[단독] 베트남 영웅 박항서, 한국 축구의 전설을 만나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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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후 9시께 경남 통영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박항서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왼쪽)과 김호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 감독은 김 전 감독을 거스 히딩크 전 감독과 함께 자신의 지도자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손꼽는다. 김민진 기자 지난 16일 오후 9시께 경남 통영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박항서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왼쪽)과 김호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 감독은 김 전 감독을 거스 히딩크 전 감독과 함께 자신의 지도자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손꼽는다. 김민진 기자
경남 통영에서 동계전지훈련 중인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17일 오전 훈련에 앞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훈련 모습도 공개했다. 디지털센터 정수원PD blueskyda2@

영웅과 전설이 만났다. 베트남 축구를 60년 만에 동남아시안(SEA)게임 정상에 올려놓으며 베트남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과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김호 전 국가대표팀 감독.

박 감독이 23세 이하(U-23) 대표팀을 이끌고 경남 통영에서 동계전지훈련에 돌입한 지 3일째인 지난 16일 오후 9시께, 이제는 ‘명장’ 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두 감독이 통영의 한 커피전문점에 마주 앉았다. 베트남 대표팀 유니폼을 벗고 청바지에 겨울 외투를 걸치고 들어선 박 감독은 먼저와 기다리던 김 전 감독을 보며 ‘선배님’ 하며 빙그레 웃었다. 좀처럼 웃음을 보이지 않는 김 전 감독도 ‘이리 오라’며 반갑게 맞았다.

두 사람 모두 “얼마 만인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김 전 감독은 “평소 전화나 SNS로 연락은 자주 주고받는데, 실제로 만난 건 참 오랜만이다. 박 감독이 베트남 간 이후론 처음인 듯하다”고 했다. 곁에 있던 박 감독도 수긍하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 사람은 조금 전까지 강석주 통영시장이 준비한 만찬장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했었다. 하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겨우 구석진 자리를 잡고 무장해제한 박 감독이 이때라며 못다 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기분 좋은 웃음이 섞인 대화가 오간다. 박 감독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내까지 모두 털어놓는다. 스승과 제자, 그 이상의 각별함이 오롯이 묻어난다.


지난 16일 경남 통영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김호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민진 기자 지난 16일 경남 통영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김호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민진 기자

박 감독의 축구 인생에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4명의 은사가 있다. 선수 시절을 놓고 보면 늦깍이에 축구화를 신을 수 있게 기회를 준 장운수 전 경신고 감독과 선수로 한 단계 발전시켜 준 최은택 전 한양대 감독이다. 그리고 지도자 스승으로 거스 히딩크 전 감독과 함께 김 전 감독을 첫손에 꼽는다. 히딩크 감독이 지도자로서 꽃을 피울 수 있게 했다면 김 전 감독은 지도자로서 눈을 뜨게 해 줬다는 것이다.

박 감독과 김 전 감독의 인연은 25년 전인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른한 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무명의 박 감독을 당시 대표팀 트레이너로 합류시킨 장본인이 김 전 감독이다.

박 감독은 “그때는 학연·지연이 필요하던 시절인데, 감독님과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고맙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 ‘왜 뽑으셨냐’고 되묻기까지 했었다”고 돌아봤다. 반면 김 전 감독은 “현역 시절부터 유심히 지켜본 선수였다. 발탁 기준은 딱 두 가지였다. 축구를 향한 열정과 성실함이다. 부지런한 것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다”면서 “당시 내가 구상하는 팀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소신껏 밀어붙였다”고 했다. 박 감독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바로 김 전 감독인 셈이다. 월드컵 이후엔 프로팀 수원 삼성 창단 멤버로 김호 감독과 6년 넘게 한솥밥을 먹었다. 당시 박 감독을 발탁한 이도 김 전 감독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히딩크 전 감독과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2002년을 계기로 슬럼프가 찾아왔다. 2015년 12월 상주 상무 감독에서 물러난 뒤 1년여를 허송세월했다. 이후 창원시청 축구단을 이끌다 베트남축구협회의 선택을 받았다.

2017년 10월 베트남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박 감독은 기적 같은 성공 스토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아시아 U-23 챔피언십 준우승을 시작으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진출, 스즈키컵 우승 그리고 올해 1월 UAE 아시안컵 8강, 이번 SEA게임 금메달까지 베트남 축구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금의환향하는 기특한 제자가 자신의 고향인 통영에서 전지훈련을 한다는 소식에 김 전 감독도 적잖게 들떴다.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에 입국 하루 전인 13일, 무작정 서울을 떠나 통영에 왔다.

하지만 막상 내려와선 연락을 못 했다. 김 전 감독은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국가대표팀 감독은 너무 힘든 자리다. 엄청난 부담에 빠듯한 일정, 작은 격려조차 부담이 될 때가 많다. 행여 내가 그러진 않을까 걱정됐다”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에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주변 지인들을 통해 뒤늦게 김 전 감독이 자신을 보러 통영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박 감독도 알았다. 훈련에 전념하려 되도록 외부 접촉을 피하던 박 감독이지만 김 전 감독 만큼은 먼저 전화해 ‘뵙고싶다’ 청했다. 첫 마디가 ‘연락이 늦어 죄송합니다’였다. 그렇게 성사된 만남이 바로 이날, 이 순간이었다.

지난 16일 경남 통영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김호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민진 기자 지난 16일 경남 통영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김호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민진 기자

청출어람. 김 전 감독은 이미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됐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풍파는 누구나 겪는 과정이다. 중요한 건 지금이다. 엄청난 노력파라 딱히 조언할 것도 없고 걱정도 안 한다”며 “급변하는 세계 축구의 흐름만 잘 따른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큰 일을 해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박 감독은 “스승의 날이나 명절 때가 되면 (선배님이) 생각난다.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기만 했다. 이제라도 뵙게 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면서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다. 대한민국 축구의 산증인이자 축구계를 지탱하는 원로로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주시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화답했다.

그렇게 1시간여.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제야 박 감독을 알아본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앞다퉈 인증샷을 부탁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계속된 강행군에 지나친 관심이 피곤할 법도 한데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한 명, 한 명과 사진 촬영에 응한다. 이런 박 감독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김 전 감독이 나지막이 혼잣말한다. “그래, 딱 지금처럼만 하면 돼.”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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