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06번째 증언 "삼청교육대·교도소보다 더해... 사람이 갈 곳이 아니야"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최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게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사람 살 곳이 아니었어". 담배를 피워 문 여인철(60) 씨의 눈빛이 흐려진다.

1984년 1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 씨의 마음은 무너졌다. 상실감을 달래려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다. 초봄 어느 날,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는데 경찰 3명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영문도 모른 채 '이상한 곳'으로 끌려간 여 씨.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형제복지원'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걸베이(거지)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던 여 씨. 그런데 멀쩡한 사람들도 생활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도 몇몇 눈에 띄었다.

여 씨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빨리 나가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성가대' 활동을 하면 집에 보내 준다 했지만 말 뿐이었다.

운전교육대에서 운전면허증을 따면 사회 진출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교육대에서 '배차' 담당을 맡아 열심히 생활했지만 운전시험 전날 일이 터졌다. 소대원들 담배를 빼앗아 피우는 조장에게 한소리를 했다가 다툼으로 번졌다. 여 씨만 총무과에 끌려갔고 '근신소대'로 보내졌다.

돌을 깨고 똥을 퍼나르는 일을 하며 원생들 중에서도 가장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던 여 씨. 가을께 공장이 들어오면서 봉제공장 다림질 일을 맡았다. 공장 일을 하면 '통장'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강제로 끌려온 지 정확히 11개월하고 보름되던 날, 뒤늦게 동생의 소재를 알게 된 형과 형수가 찾아왔다.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급했다. 통장은 언감생심, 입소 때 입고 온 옷이 전부였다.

여 씨는 삼청교육대와 교도소도 다녀온 적이 있다. 하지만 가장 심한 곳은 '형제복지원'이라고 단언한다.

1980년 몸에 문신이 있다는 이유로 붙잡혀, 교도소 복역 대신 삼청교육대를 자원했다. 죄가 있다면 있었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받아들일 수 없다. 멀쩡히 집에 있던 스물다섯 청년을 거리의 부랑인들과 함께하는 처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퇴소 후엔 형제복지원 쪽으로 침도 뱉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날 때면 애써 반대편 창가에 앉았다.

여 씨 인생은 제 궤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운전교육대 시절 시험을 위해 주소지를 이전했던 '기록'이 사회에서 '주홍글씨'가 됐다.

취직을 하려 해도 '형제복지원 출신'이란 낙인이 발목을 잡았다. 형제복지원 실상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를 '인간 이하' 취급했다.

할 수 없이 서면 일대에서 구르마(수레) 장사를 하다 노래방을 차렸지만 IMF 직격탄을 맞았다.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 술을 마셨고, 담배를 사러 가다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선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중환자실에서 15일 만에 깨어났다. 마음의 상처에다 몸까지 성치 않자 약을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2016년 박인근 원장이 지병으로 사망한 뒤 여 씨 마음은 더 허망하다. 아들이나 친척 등 형제복지원에 관여했던 이들이라도 매스컴에 나와 정식으로 사과해주길 바랄 뿐이다.

'형제복지원' 하면 아직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이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역전파출소 경찰과 형제복지원 관계자가 함께 노숙인 단속을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역전파출소 경찰과 형제복지원 관계자가 함께 노숙인 단속을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삼청교육대보다 더한…

(어머니)상을 다 치르고 난 뒤에 내가 괴로워서 술을 좀 마셨어. 그날 비가 억수로 왔어.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경찰관 3명인가 그때 왔어. 우의를 입고 방에 그냥 들어왔어. 신발 신은 채로...

"당신들 누구냐?" (경찰차를 타고) 이상하게... 자꾸 가는 데 희한하게 가더라고. 어디 끌려가는 줄도 몰랐어. 가다 보니까 막 산길로 해서 올라가더라고.

"아 여기 어디 가요?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델꼬 가노?" 아무 말도 없더라고.

"어느 지구대에서 나왔소?" 알고 보니 (부전)시립도서관 옆 지구대라.

술이 돼서 어디가 어딘 줄도 모르고 그날 하룻밤을 거기서 잤어요. 아침 되니까 사람이 굉장히 많아. 이게 뭐하는 건지... 교도소도 아니고 희한한 데 왔어.

내가 아는 사람들도 있고 이렇더라고. 아침에 날이 새고 나서 보니까. 그래서 "여기가 뭐하는 데고?" 물으니 형제복지원이라더라고.

내가 삼청교육대도 가보고 교도소도 갔다와봤는데. 이거는 그거보다 더한 데라 여기는. 사람이 갈 장소가 아닌 거라.

'시발 우리 형님이 내를 이리로 잡아 넣었나' 싶기도 하고. 오만 생각을 다 가졌어 내가. 그 당시에는. 내가 내 집에 있는데 어떻게 (경찰들이)와서 나를 데리고 갔나 말이야.

어떻게 빨리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성가대' 가입을 하면, 성가대 잘하면 내보내 준다 해서... 있으니 안 되더라고.

운전 교육을 배우면 밖에 사회진출을 시켜준다 이거라... 면허증을 따면.

그래서 운전교육대에 갔어요. 그런데 운전면허 시험 전 날, 조장하고 나하고 화장실에서 좀 다툼이 있었어요.

조장은 빼고 나만 총무과에 끌려 갔어. 그때 총무 이름이 김돈영이라. 기억을 해 그거는.

내가 뺨을 한 대 맞었어 거기서. "그냥 못 하겠습니다. 여기가 무슨 강제도 아니고... 왜 내가 여기 있어야 되느냐" 반항을 했지.

그러니까 '똥복'을 입혀버리더라고. 그 안에서는 죄수복이라 (똥복)그게.

그걸 입고 이제 6소대를 갔어요. 망치로 돌 깨러도 가고 똥도 퍼야 되고 막 일만 시키는 곳이라 거기는.

(6소대가 소위 '근신소대'라고 하는?) 근신소대지 그거. 쉽게 말하자면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이한테 불평불만 많은 아이들만 거기 들어가는 거라. 도망을 간다든지 반항을 한다든지.

형제복지원 운전교육대 행사 장면.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운전교육대 행사 장면.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보세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보세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쇼에 동원된 '소 두 마리'

한 가을쯤 됐나... 사회에서 뭐가 들어왔나 하면, 공장이 들어왔어요. 보세공장 옷 다리는 데. 거기 가니 통장을 만들어 준다더라고. 나는 통장 보지도 못했고... 그 돈이 얼마 들어왔는지도 몰라.

내가 11개월 보름 만에 나왔으니까 거기서. 형하고 형수가 찾아왔어. 자기네들이 내 일 시켜놓은 거... 통장 만들어놨으니 돌려줘야 될 거 아냐. 내가 10원도 안 받고 거기서 그냥 나왔어.

내 입고 갔던 옷... 세탁해놓은 거 그것만 받아 입고. 나오는 게 급선무니까 그런 건(통장) 생각도 없는 거라.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이면 말을 많이 합니다. 산 위에 교회당 위에는 죽은 사람(무덤)이 있다는 소리 나도 많이 들었어. 애 낳다가 유산돼서 죽은 애도 있고. 있다가 잘못 관리해서 죽은 애들도 있고. 그런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고.

가족도 없고 좀 연고가 옳지 않은 사람들은 차출해서 뽑아서, 울진(*실제는 울산시 울주군) 농장으로 가는 거라.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났다는 걸 들었어. 사람 시체가 나오고... 일곱 명인가 나오고.

그러고 난 뒤에 형제복지원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라고. 좀 있으니까 박인근이 구속되고.

자기 아들내미가 (정신)요양원 대표로 있었거든요. 총 관리는 박인근 처제의 남편이라. 김돈영이라는 사람은.

근데 이 박인근이라는 사람이 원래 군수사령부에 있다가 상사로 제대한 사람인데. 옛날에 복싱을 했다더라고. 아침되면 가죽장갑을 끼고 연병장에서 복싱 연습하고 이랬다고 그 사람이. 키도 쪼깨난데 뭐. 1m 60cm도 안 될 거야.

시에서 들어온 물품이 꽉... 산더미 같이 차 있어요. 창고 안에. 부산시장이 온다든지 이러면 옷을 싹 갈아입힙니다. 갓난애들... 애들부터 싹 다 갈아입히고 이발 다 시키고.

마당에 소 두 마리를 갖다가 걸어놔. 그걸 잡아서 원생들을 먹인다는 식으로. 형식적·가식적이라 그거는.

그러고 나중에 저녁되면, 손님 다 가고 나면 소 잡은 걸 전부 자기 가족들이 다 나눠먹어. 그 안에 아파트(사택)가 있으니까 자기 가족들끼리 다 나눠먹는 상태라.

손님들이 오면 박인근이하고 총무하고 따라다니면서 이런 식으로 견학을 시키는 거지. '이렇게 시설을 해서 이렇게 사람을 생활하게 만들고 있다'. 식당도 구경 다 시키고...

누가 온다 그러면 식당하고 대청소 다 합니다. 뭐 책 보는 척하고... 다 앉아 있어. 사람들이 눈으로 볼 때는 아무 이상이 없지 그냥 뭐. 다들 잘 돌아가고... 생활 잘하고 있고 사람들 깨끗하게 있지 이러니 뭐.

(운전교육대) 애들 교육하는 거 다 보고... 명분은 좋지. 외부 사람들 왔을 때 '요렇게 면허증 따서 나갑니다'. 나가는 사람도 있어요. 있긴 있는데 그거 과연 몇 명이 되겠습니까. 자기들 쓰려고 하는 건데.

운전면허증을 따면 밖에 안 내보고 조교를 시켜요. 외부 사람들이 볼 땐... 이 조교들이 외부에서 온 줄 아는 거라.

운전 할 줄 알아도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아이들이 있어. 그런 아이들은 잡아서 저기... 형제복지원에서 일 안 시키고, 다른 데 울진(울주)이나 저런 데 보내서 작업을 시키는 거라. 면허증도 있겠다...

형제복지원 시설을 둘러보는 당시 부산시장 일행.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시설을 둘러보는 당시 부산시장 일행.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공산국가도 아닌데…

사실 내가 더러운 교도소 갔다와도 남한테 말하기도 싫은데. 삼청교육대 교육 받고 온 것도 말하기 싫은데. 그거보다 더한 곳이 형제복지원이더라고.

1980년도 5월 달에 삼청교육대에서 나왔는데. 형제복지원은 물어보지도 않고... 여기 어떻게 왔는지 이야기도 안 해주고. 무조건 감금시켜가지고 해놓은 자체가... 이게 무슨 김일성이 부대도 아니고. 공산국가도 아니고.

24~25살 한창 날개 펴고... 뭘 해도 해먹고 기술 배워도 배울 수 있고. 어디 가서 취직 자리를 얻어도 되는데. 거기 갖다오니까 주위에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인간 이하'로 보는 거라... 인간 이하로...

쉽게 말하면 나는 걸베이(거지)들만 그런 데 가서 생활하는 줄 알았는데, 일반인이 거기 들어가서 같이 어울려 있었다는 자체가 내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더라고. 한솥에 한밥 먹고 한지붕 밑에 잠자고... 같이 했다는 자체가 나한텐 너무 트라우마가 심한 거라.

가족도 없고 보호자도 없는 사람들이 여기 와 있는 것 같으면 '당신네들 참 잘한다' 하겠는데. 일반인들, 외부 사람을 잡아 넣어갖고 이런 식으로 고생을 시키고. 민주국가에서 이건 있을 수가 없잖아요.

당연히 삼청교육대는 내가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가야되는 거지만. 물론 그 중에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삼청교육대)갈 때는 몸에 문신 있다고 잡아 넣었기 때문에, 가야 되는 거지만. 내가 죄도 안 짓고 술 먹고 내 집에서 자다가 잡혀가는 거는... 이거는 아니단 말이야...

퇴소하고 나서는 취직이 안 돼서... 구르마(수레) 해가지고 장사를 했죠. 서면 대한극장쪽, 이쪽으로 복개천으로 다니면서. 노가다 건설 회사도 가서 일을 해봤고.

동생이 돈이 좀 된다 해가지고 노래방 하나 차려줘서 97년도... 그런데 IMF가 딱 오는 바람에... 하루에 150만 원 매상 오르던 게 어느날 갑자기 한 3개월 지나고 나니까 20만 원... 15만 원... 결국 가게를 팔아야 되더라고.

추석 날 저녁이지. 저녁에 술 한 잔 먹고 손님들하고 먹고 나와서... 담배 사러 들어가다, 차 밖에서 뺑소니를 당해서 이렇게 병신이 돼버렸어. 중환자실에서 내가 15일 만에 깨어났어요. 죽었다 했는데.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는데. 동의의료원에서 다 씻어내고 해서...

울산시 울주군에 있던 형제복지원 농장.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울산시 울주군에 있던 형제복지원 농장.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그쪽으론 침도 안 뱉어"

'형제복지원'이란 말만 들어도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가 그냥 받히고. 내가 지나가다 침도 거기로 뱉기 싫다 안 합니까.

왜냐면 버스 타면... 사상 가려면 거기로 지나가야 돼. 창가에 앉아도 요쪽 편으로 앉지... 도로변(안)쪽으로는 안 앉는 거라.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는다지만. 죄도 없고 남한테 해코지 한 것도 아니고. 내 한창 그 당시 성장기 아닙니까. 좋은 것만 봤으면 좋은 데로 갈 건데. 더러운 데 가서 더 더러운 걸 봐버렸으니까. 나한테는 엄청나게 쌓여 있는 거라 그게. 내뿐만 아니고 갔다온 아이들 다 그럴 겁니다.

나는 거기(형제복지원)에 그 주소에 퇴거(주소지)가 얹혀 있었어. 왜? (운전)교육대 생활을 하다 보니까. 당연히 퇴거(주소지 이전)가 돼야 시험을 칠 수 있으니까. 등본 떼고 초본 떼고 이러면... 그 주소(형제복지원)가 튀어나오면 그 당시엔 진짜 괴로운 거야.

어디 서류를 넣어서 일을 하려고 하면... 걸베이 취급을 해버리니깐. 사람을 영 얕잡아 보니깐. 그러니까 내 길이 다 막혀버린 거라. 좋은 데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못된 놈하고 접하는 건 쉽고... 좋은 사람 만나는 길은 힘든 거라.

그러다보니 뭐 평생 이 꼬라지로 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지금. 거기 갔다가 잘 사는 아이들이 몇 명 있겠습니까 과연?

(박인근의) 자식이라도 나와서 옳은 사과를 하고. 아닌 말로 방송에서 국민들한테... 우리 부산 시민이 알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어.

왜냐 그러면,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인식을 하고 있는... 형제복지원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 없을 겁니다. '아 그때 그 사람들 고생했구나. 그렇게 있었구나' 하는 걸... 이런 이미지라도 남겨줬으면 좋겠어.

이걸 어떻게 잘 밝혀서... 좀... 그 당시에 거기 갇혀 있었던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기쁜 소식이 오고. 좀 회복될 수 있는 이런 말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어요.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