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12번째 증언 "호적 등본 떼보니, 아버지가 '박인근'으로…"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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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있는 아이들도 마구잡이 끌려와
박인근 원장 아들로 호적 올리기도
1987년 이슈화, '박종철 사건'에 묻혀
보급 안 돼 7년 전 '아동 옷' 입고 퇴소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최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잊고 싶은 이름, 원수보다 더한 존재가 '아버지'라니...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난 지 10년. 자동차를 사기 위해 호적 등본을 뗀 강철민(51·가명) 씨는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 이름 칸에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 이름 석 자가, 자신은 그의 아들로 등록돼 있었다.

강 씨의 친부, 어머니가 재혼한 새 아버지, 그리고 서류상 아버지인 박인근 원장까지. 강 씨에겐 아버지가 3명인 셈이다.

어린 시절, 뿌리에 대한 혼란은 강 씨를 밖으로 돌게 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 소년의집에서 생활하다 2년 뒤 부산 형제복지원으로 이첩됐다.

강 씨는 싸움을 잘한다는 이유로 곧바로 '아동소대' 조장을 맡았다. 이후 7년 내내 아동소대에서 조장으로 생활했다. 아동소대를 거쳐간 원생들 중 '하마(물을 많이 먹어서 붙은 별명)' 조장을 모르는 이는 없다.

소대원 관리를 위해 조장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때리지 않으면 조장들이 '총반장'에게 맞았다. 일반 소대원들에겐 '중대장', 간부들은 '총반장'이라 불렀다.

강 씨는 자신이 살기 위해 아이들을 때렸지만 뒤에서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밖에서 만났다면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참상이 담장 밖으로 알려지면서 다같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깥 세상의 부정적인 시선 탓에 '형제복지원'이 적힌 옷을 그대로 입을 순 없었다. 사복은 지급되지 않았다. 7년 전 입소 당시 입었던 옷을 찢어서 걸쳤다.

강 씨가 유일하게 내세울 건 '주먹'이었다. 체육관에 들어가 복싱을 시작했고, 서울 올림픽을 목표로 삼았다.

국가대표 선발 최종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시합 전날 술을 많이 마셨고, 결국 링에 오르지 못했다. 꿈은 사라졌다.

이후 어둠의 세계로 빠졌다. 업소를 돌며 삥을 뜯어 생활했다. 교도소도 들락날락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마지막 출소를 했다. 서울에서 경호원 생활을 하다 지금은 사촌형이 운영하는 건설사에서 일하고 있다.

1990년대 사촌형으로부터 연락이 온 적이 있다. 아파트 건설 공사를 맡아달라는 제안. 주례동 산 18번지. 형제복지원이 있던 자리였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땅을 파면 무엇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강 씨는 사촌형을 설득했고, 따낸 입찰권을 포기했다.

한종선, 최승우, 김대우...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정부 진상조사까지 이끌어낸 동생들이다.

강 씨는 그저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앞장서서 그 일을 해주고 있는 동생들이 고맙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이 이뤄져야 하지만 본인은 괜찮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3명인 채로 살아야 했던 시절.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부랑인아'로 단속된 아이들이 형제복지원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부랑인아'로 단속된 아이들이 형제복지원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 졸지에 3명이 된 아버지

내가 등본 뗄 일 있어가지고. 차 사려고요. 1997년인가. 이때 등본을 떼보니까...

주소는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형제복지원 주소)로 돼 있고... '부(父).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

형제복지원에 있던 부모 애들 보면 대충 다 그랬어요. 아버지가 '박'. 박인근...

공무원들은 후처와 결혼해 살아도 호적을 못 올렸다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호적이 없이 살았거든요. 계속. 그때 제가 이름도 몰랐었고요.

엄마가 재혼을 했어요. 그 아버지 성함이 '박' 씨였거든요. 제 원 호적은 '강' 씨인데.

이리로 가면 치이고... 집에 있으면 강 씨 아버지 오면 열받고요. 이리로 오면 이번엔 박 씨 아닙니까. 그러니깐 나는 어차피 이 세상에 나올 사람도 아닌데... 라고 생각했죠.

제가 아버지를 96년도에 찾았거든요? 강 씨 아버지를요.

(2004년에) 돈 1000만 원을 주고 그 당시 호적을 다 바꿨는데. 바꿀 때 참 허무하더라고요. 내가 원 이름 놔두고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기분이 안 좋지요. 왜냐면, 나도 내 부모가 있는데 왜 이 사람(박인근)이 내 아버지가 돼야 되는지.

(형제복지원에서) 보낸 세월도 서글프지만. 잊고 싶은데 자꾸 나온다 아닙니까... 박인근... 박인근... 이름 석 자가... 이 갈리지요.

만약에 내 입장 같았으면 어떡하겠습니까. 부모는 한 명입니다. 그런데 '부'가 세 명이에요.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세월... 그거 어떻게 할 건데요. 이거는 보상문제가 아니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 엄마하고 부모하고 손 잡고 학교도 가고 싶은데. 가지도 못하고... 갇혀가지고 있고... 그 세월 다... 누가 보상해줄 건데요.

'부랑인아'로 단속돼 차량에서 내리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부랑인아'로 단속돼 차량에서 내리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맞는데 이유는 없어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서울로 간 거예요. (서울)소년의집에서 부산 형제복지원으로 넘어왔거든요. 나이가 차다 보니까 이첩된 거죠.

제가 싸움을 잘해서 처음부터 조장이었거든요. 조장 같으면... 상당한 파워예요.

나머지 아이들은 좀 비참했다고 봐야죠. 저 같은 사람(간부)은 상관 없는데 일반 애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거 못하고 부모 손도 못 잡고. 그런 애들 많다 아닙니까.

아무 이유 없이 온 애들이 많아요... 이유 없이... 가다가 학교 가다가 잡혀온 애들도 많고.

밑에 애들은 힘이 없으니까. 만약 소대장이 때리라고 하면 때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우리가 안 맞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패도... 참 돌아서서 많이 울어요 나도. 왜냐면 나도 저만한 애들... 동생도 있을 거고...

관리 치고는 너무 빡세게 했죠.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되니까. 마음이 안 편하지요. 티이틀만 그거(조장)인데 마음은 안 그렇지요.

7년을 (조장)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형제복지원 폐쇄될 때까지 있었거든요.

(최)승우나 (한)종선이 같은 경우는 다 내 밑에 있었거든요. (김)대우(*'살아남은 형제들' 02번째 증언자)도 있었어요.

저도 많이 맞았죠.(간부들 중에서도) 총반장이 있거든요.

(간부들은 중대장을 '총반장'이라고 부르는 건가요?)

네. 기합 받다가 맞아가지고 여기 찢어졌거든요 여기.

(총반장한테 맞아서?)

예. 맞아도 피나도... 내가 살려고 하면 애들한테 가서 혼내고.

애들은 맞으면 '왜 맞지?'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게 이유 없이 맞는 거예요.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하면 한 사람 때문에 애들 다 맞는 거예요.

진짜 오갈 데 없는 애들이 왔으면 이해를 해요. 다 부모 있는 애들인데. 하루 아침에 애가 없어지면 부모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도 애 있으면 똑같은 심정일 거고. 만약 그 사람들의 자식이 (거기) 있다고 하면 아마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빽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보니까 그냥 무조건 끌려가야 되고... 맞아야 되고...

형제복지원 내 교회당(새마음교회) 종탑 건설 현장.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교회당(새마음교회) 종탑 건설 현장.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교회당(새마음교회) 건설 현장.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교회당(새마음교회) 건설 현장.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맞아서 실려나간 뒤 사라진 아이들

(형제복지원 안에서 뭐라고 불리셨어요?)

'하마'라고 불렸죠. 하마라고 했어요. 물을 많이 먹어가지고.

저기 '까마귀'(김대우) 있잖아요. 승우 재우... 재우는 죽었지요. 최승우(*'살아남은 형제들' 03번째 증언자) 동생(재우)이 죽었거든요.

저 아이(김대우) 형이 김경우(*'살아남은 형제들' 07번째 증언자)예요. 형제간도 많이 있었어요. 그때 거기.

'사건'은 좀 많지요. 사람이 맞아서 정신이 혼미... 혼수상태가 온다 아닙니까. 우리는 어디 갔는지 몰라요.

일단 의무실에 가긴 가는데. 근데 얘가 가면 안 돌아와요. 과연 그 애가 어디 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많지요. 상당히. 수십 건 수백 건 되겠죠. 아마도요.

조장들은 서로 열람할 수 있거든요. 물어볼 수도 있고. "오늘은 무슨 일 없었냐" 그렇게 물어보면 "우리 소대에서 누가 오늘 나갔는데 애가 안 돌아오더라".

그러면 집에 갔는가? 이상하거든요?

(박인근 원장을) 내가 한 여섯 번 봤을 거예요. 교회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가지고. 우리가 다 짓고 난 다음에 이용복 가수가 와가지고. 혹시 아실 겁니다. 장애인 가수 있잖아요.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외부인한테 알리는 거지요. 사실은 그게 아닌데. 일단 보여주기 식이죠.

(박인근 원장은) 혼자 오는 게 아니고 경호처럼 여러 명이 주변에 딱 붙습니다. 혹시 해코지할까 봐.

애들은 이제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앙심'밖에 없거든요. '내가 점마(박인근) 때문에 왜 여기 왔지?'. '내 부모가 있고 다 있는데'.

형제복지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사라진 올림픽 출전 꿈

식사는 영 안 좋다고 봐야죠. 밖에서 따지면 '최하' 있잖아요. '최하'보다 더 심한 거예요. 사람이 먹을 것이 아니지요.

일종의 뭐 '짬밥'이라 보면 되지요. '짬밥'. 그거 버리긴 아깝고. 안 먹으면 애들 배고프다 아닙니까. 그럼 먹어야 돼요. 그걸 먹어야 살지요.

(형제복지원 안에 학교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예. '개금분교'가 있었어요. 모든 게 통제되니까 내가 가서 배운들 뭐 하겠습니까. 인생 포기한 상태지요.

그해에 아마 '박종철' 사건 났을 거예요. 그때 다 묻혔거든요. 이 형제복지원(사건)이 싹 다 묻힌 거예요. 그때 언론에서 막 왔다가 그냥 다 올라가 버렸어요. 전부 다.

원생들 전부 퇴소 조치가 내려지면서 며칠 걸려서 나왔지요... 하루 만에 다 나온 게 아니고요

내가 들어갔을 때 그 옷이 있을 거 아닙니까. 7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 옷이 작아요. 그걸 그대로 입고 나오는 거예요.

안에서 입던 추리닝은 뒤에 '형제복지원' 글자가 적혀 있어서. 사람들 시선이 안 좋기 때문에...

(입소 당시 옷이) 작으면 옆에 째거든요. 째서 이렇게 좀 벌려요. 옷을 갖다가.

형제복지원 나오고 철길 건너면 외부로 나가거든요. 가게나 슈퍼 가서... 남는 옷 달라 해가지고. 그건 일종의 '구걸'이지요

혹시 오광수 씨 알지요? 복싱 선수. 그 사람하고 내가 88년 서울 올림픽 나가려고. 복싱 선수 하다가 내가 최종전에서 떨어졌거든요.

(최종전 경기) 전날 선배랑 술 먹고. 그래서 경기를 못 나갔지요. 배운 거라곤 뭐 싸움박질밖에 없으니까. 운동을 해서 올림픽 나가려고 했다가 못 나갔고요.

그러니까 뭐 있습니까. 밖에 나가서 이제... '어둠의 세계'에서 굴렀지요.

깡패 생활도 하고. 배운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1987년 1월 20일 자 <부산일보>에 실린 형제복지원 기사(왼쪽 위)와 박종철 사건 기사(오른쪽 위). 부산일보DB 1987년 1월 20일 자 <부산일보>에 실린 형제복지원 기사(왼쪽 위)와 박종철 사건 기사(오른쪽 위). 부산일보DB
형제복지원 내 설립된 '개금국민학교 분교'의 수업 장면.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설립된 '개금국민학교 분교'의 수업 장면.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주례동 산 18번지' 그곳엔…

생활은 어차피 가게 가서 좀 뺏들고. 업소 가서 유흥업소 가서 좀 뺏들고.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 선포했다 아닙니까. 선포한 그해에 제가 (교도소) 들어가서 7년 살고요. 30대 40대 이때는 그런 생활을 많이 했지요.

마지막에 나온 게 2002년 그때 월드컵 보고 나왔거든요. (교도소) 안에서. 나와서 이제 경호팀에 좀 있다가. 경호원 생활 좀 하고요.

부산 온 지는... 2011년도에 왔으니까요. 11년도에 이 업을 시작했거든요. 건설쪽...

'주례동 산 18번지' 여기를 저희가 공사를 하려다가... 입찰했다가 제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사촌) 형이 대표이사를 보니까...

"이거는 포기를 하자" "내가 집 못 짓는다"

(아파트 짓는 거 말씀이시죠?)

예. 그걸 제가 알기 때문에... 파면 뭐가 나온다는 걸 알 거 아닙니까. 거기에 내가 솔직히 있었고. 그렇게 고생 다 했는데... 거기 누가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 짓죠.

나는 경호원 할 때도 국회의원 경호해주라 하면 절대 안 하거든요. 가서 맞든가 말든가. 우리는 이만큼 고생해가지고 컸는데. 지는 앉아서 가만 있잖아요 월급만 받고.

제가 김형오 씨하고는 한 4년인가 같이 근무했거든요. 국회의장요. 하다 보니 이제 열이 살살 받더라고요. '내가 뭐 때문에 해줘야 되지?'

내가 승우하고 종선이 보고 이랬습니다. "나는 돈 다 싫고... 너희가 한 건 잘했다" "잘했고 이걸 알린 거에 대해선 고맙다".

내가 만약에 형제원 안 가고 밖에 있었으면 아마 더 잘됐을지 모르죠.

지금은 좀 마음 편한 게. 어차피 드러난 거... 그것만 해도 만족하죠.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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