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정달식 라이프부장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엉뚱하게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시 <해변의 묘지>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지난 3일 태풍 ‘마이삭’이 부산을 강타하던 날 밤,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며 느꼈던 솔직한 심정이다. 벌어진 창틀 사이에 겹겹이 종이를 끼우고 만반의 대비를 했지만, 막상 몰아치는 초강력 바람과 창틀의 흔들림, 덜컹거리는 유리창 소리에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일순 두려움으로 변해 버렸다. 오로지 아무 일 없이 빠르게 태풍이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고나 할까.
4~5개의 태풍이 한반도와 그 부근을 지나갈 정도로 올해는 유난히 태풍이 잦다. 태풍 마이삭이 부산을 지나가던 날, 부산은 밤새 공포와 마주해야 했다. 강한 바람이 고층 건물 사이를 통과하면서 바람의 세기가 강해져 이른바 ‘빌딩풍’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바닷가 일부 지역에서는 빌딩풍이 자갈 등 돌멩이를 위로 솟구쳐 올려 아파트 유리창을 파손시키는 투석기 역할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 아파트는 빌딩풍의 거센 바람이 아파트 옹벽을 만나면서 무려 30층 높이까지 돌멩이가 솟구쳐 아파트 창문이 총 맞은 듯 박살 난 경우도 있었다.
기존 바람 2배 이상 증폭 ‘빌딩풍’
신종 재난 돼, 삶 속 현실로 다가와
바람길 열어 다른 건물 영향 덜 주고
‘빌딩풍 환경영향평가’로 선제 대응을
빌딩풍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1.5~2배 이상 증폭하는 엄청난 힘을 가진다. 외곽 바람이 고층 빌딩 숲을 만나 잇따라 부딪히고 회오리치면서 바람의 세기와 압력이 순식간에 커져 초강력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빌딩풍이 때론 주변 구조물을 붕괴시키고, 인명 피해까지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빌딩풍에 대한 경고와 피해는 사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있었다. 2018년 10월 태풍 ‘콩레이’가 부산을 강타했을 때 해운대 주상복합건물(엘시티) 유리창 1000여 장이 강풍에 흔들린 크레인 와이어에 맞아 박살 난 게 그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해 9월 발생한 태풍 ‘링링’도 빌딩풍의 위험성을 경고했었다.
이제 빌딩풍은 신종 재난이 돼 버렸다. 빌딩풍이 현실이 됐으니, 더는 빌딩풍에 대한 대비책을 미룰 상황이 아니다.
현재 국내는 빌딩풍에 견디는 해안가 초고층 건물의 설계나 시공 기준 등이 마련돼 있지 않다. 고층 건물을 짓더라도 빌딩풍 환경영향평가를 받도록 규정한 법도 없다. 하지만 영국이나 일본은 빌딩풍에 대비해 방풍 펜스를 세우거나 건물 신축 때 바람구멍을 내는 등 대책을 마련 중이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은 일정 높이 이상 건물을 지을 때 빌딩풍 환경영향평가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고 있다.
싱가포르나 홍콩은 일찍부터 빌딩풍에 관심이 높았다. 15년 전 일이다. 기자는 싱가포르와 홍콩의 친환경 주거 단지 및 주택 관련 정책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싱가포르 주택국에서 도시에 부는 바람의 세기와 흐름까지 면밀히 연구·분석하고 있었고, 이런 바람의 움직임을 간파해 소위 ‘바람길’ ‘바람구멍’이라는 이름으로 고층 건물 건립·설계 과정에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땐 다소 신기해하면서도 내심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이게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 되었다.
이에 비하면, 우린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올해 4월부터 부산에서 빌딩풍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시재난안전대책본부와 연계해 빌딩풍에 대한 위험도를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그 위험성을 시민에게 알리고, 또 예방책이나 대안도 제시하게 될 터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 속에서도 전문가들은 좀 더 발 빠른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부산대학교 빌딩풍연구단을 이끄는 사회환경시스템공학과 권순철 교수는 “일정 높이 이상의 고층 건물을 지을 때, 빌딩풍 환경영향평가를 의무화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빌딩풍을 줄이기 위한 건물 설계나 배치도 필요하다. 안용대 가가건축 대표는 “건물을 지을 때 바람길을 열어 줘 다른 건물엔 바람의 영향을 덜 주고, 새 건물에는 빌딩풍을 이겨낼 저항력을 키워주는 공법이나 설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유리창 설계 기준 강화다. 강화 유리는 기본이고, 창틀의 가로세로 비율을 고려하고, 기존 건물은 유리가 깨졌을 때 흩어지지 않게 안전필름을 부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 구조체에 대한 보강, 바람의 힘을 저감시키는 건물 디자인도 대책이 될 수 있다.
부산 해운대는 현재 50층 이상, 높이 200m 이상 빌딩이 20개가 넘을 정도로 초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일상의 삶은 강한 바람과 자주 만난다. 그뿐만 아니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갈수록 초강력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할 가능성도 매우 커졌다. 시민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빌딩풍에 대한 속도감 있는 선제 대응이 절실하다. 자~ ‘하늘 바람길’을 열자.
dosol@busan.com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