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29번째 증언 "사망 아니라 '살인'…사망자 발굴 계획 세워야"
피해자 실태조사 참여 박숙경 교수
"지금도 '피 철철' 피해자들 상처"
진상 규명은 물론 사망자 발굴까지
정권 막론 이번 정부부터 시작해야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사망이 아니라 살인입니다. 사망자 발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박숙경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지난 5월 완료된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에서 심층면접을 총괄했다.
재가·재원피해자 30명, 유가족 9명, 관계자 12명 등 50여 명 중 일부는 직접 만났고, 나머지는 인터뷰 내용 분석을 통해 피해 양상을 면밀히 살폈다.
연구 과정에서 박 교수가 받은 인상은 피해자들의 상처에서 지금도 피가 철철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30년이 넘도록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형제복지원 직원은 박인근 일가를 포함해 열 명 남짓. 이들이 3000명이 넘는 수용자들을 통제한 상황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형제원이 내부적으로 철옹성처럼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엔 철저한 군대식 시스템, 수용자가 수용자를 통제하는 방식이 있었다.
19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뒤 박인근 일가에 대한 보복성 테러가 일어나지 않은 점도 의아하다. "죽이고 싶었다"고 얘기한 피해자들은 많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긴 경우는 없다. 박 교수는 "피해자들의 분노감이 해소되지 못한 채 자기 안에 남아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이번 심층면접 대상 유가족이 전하는 사망자 9명 중 무려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였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29살에 불과하다.
박 교수는 사망자 대부분이 '사실상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형제복지원 뒷산을 비롯해 얼마나 묻혔을지 모를 유해 발굴 계획을 지금부터 세워나가야 하는 이유다.
옛 형제원 부지 위엔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다. 그는 "주거지가 들어섰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체계적인 주민 이전 등을 포함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해결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전국의 유사 사례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망자 유해 발굴, 피해자 배·보상과 트라우마 치료, 책임자 처벌, 박인근 일가 재산 환수 등 어느 하나 놓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같은 참상의 반복을 막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
■ 지옥 안의 생지옥
인터뷰로만 만난 사람이 약 50명 정도 돼요. 피해자분들이 서른 분... 그다음에 유가족 아홉 분... 관계자 인터뷰 참여자가 한 열두 분 정도 될 겁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분이 이분이 자기 손으로 묻은 시신이 엄청 많은 거예요.
수용자들이 수용자들을 감시하고, 수용자들을 구타하고 수용자들을 때리고, 그 손으로 또 묻게 하고, 다시 또 자기들 손으로 건물을 짓고...
(인터뷰 할 때) 너무너무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이런 거 또 물으면 안 만날 거라고...
이분이 그러는 거예요. 그 젊은 사람들이 동상 걸려 죽고... 뭐 하고... 맞아 죽은 사람도 있고 강제노동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질병이나 이런 것들에 관련된 제대로 된 처리가 안 되면서 방임 속에 죽어간 사람도 있고. 또 알려지지 않은 것 중에 많은 게... 영아들이 굉장히 많이 죽었어요.
그리고 또 한 분은 정신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이제 정신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낙태. 그 안에서 더 약한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더 끔찍한 강간. 생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없는데, 그 지옥 안에 또 더한 생지옥.
그 형제복지원 문제가 되게 시끄럽게 얘기되다가 이렇게 확 덮여졌잖아요. 그럴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 어디로 갔냐면 전국의 시설로 뿔뿔이 흩어진 거였거든요.
그분들 중에 또 상당수는 그 안에서 충격에 의해서나 구타에 의해서나 정신질환을 갖게 된... 한종선 씨 누님('살아남은 형제들' 22번째 증언자)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잖아요.
거기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수십 년째... 그러다가 지금 살아계실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이 되게 많죠.
■ 10명 vs 3000명
마치 대명사? 무슨 관용구 같은 거예요. '87 형제복지원.'
그 안에 어린아이들이 있었고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30여 년이 다 돼가는... 이십몇 년이 지난 이 시점에 그걸 얘기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저도 상상하지 않았고...
그것을 겪어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도 피가 철철철 흐르고 있는... 봉합되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 있다는 게 느껴지고 보여지고 진술되고. 그리고 여기 이런 산산이 조각난 삶...
박인근이라고 하는 사람과 박인근 일가... 이게 다거든요. 10명 남짓... 10명 내외예요. 이해가 되세요?
그 사람들이 3000명 되는 이 수용자들을 그렇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그렇게 학대를 하고, 그렇게 하는 상황이...
"죽이고 싶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한데 그러질 못 했어요. 그 분노감이 해결되지 못한 채 자기 안에서 자기를 죽이거나 자살한 사람이 너무 많아요.
예컨대 유가족 조사한 분들이 아홉 분이었는데 그(사망자) 중에 네 분이 자살했어요. (자살 당시) 평균 연령이 스물아홉 살이에요.
■ 박인근 일가에 '책임'
'과거사법'이 통과가 됐잖아요. 이게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감도를 느끼고... 그걸 생각하신다면 사실 속도를 내셔야 되는데.
보상이 됐든 배상이 됐든 어떤 치유가 됐든 그 문제에 관한 일말의 사과가 됐든, 이거라도 한다면 이분들이 살아 있는 속에서 이뤄져야 되는데.
부산시청에서 할 건 어쨌든 이분들이 최대한 살아가는 기간 동안에 이보다 나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중에 하나가 트라우마에 관련된 제대로 된 지원인 것 같아요. 피해자들의 자조활동 이런 것들이 안정되고 섬세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지원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아마 트라우마 치료 과정의 하나일 수 있겠다...
제가 이거를 연구하면서 느낀 건 '사망이 아니고 살해다.' 설사 그 위의 주거지가 주둔했다 하더라도 체계적 이전을 통해서라도 사망자 발굴 계획을 세우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안 된다가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금 이 정부가 다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가야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저는 절대로 박인근 일가의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국가범죄이기도 하고 부산시의 범죄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들이 박인근을 내세워서 했고. 근데 그 이해관계의 상당 부분은 박인근 일가가 가져간 건데.
이 '형제복지원'이라고 하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또 다른 문제들을 풀어가는 단서가 될 수 있거든요.
사망자의 문제든... 그다음에 지금 있는 피해자들에 관련된 보상... 배상... 지원... 트라우마 치료... 그다음에 이 문제에 관여했던 책임자들에 관련된 처벌... 박인근에 관한 재산상의 환수나 그 가족들의 책임... 이런 부분들을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풀었으면 좋겠어요.
이 정부에서 다 못 끝낸다 하더라도. 이거 하나를 제대로 세워 나가면서 사실 그다음의 반복을 막을 수 있고, 또 다른 사건을 풀어낼 수 있는 그 근거들을 마련해내게 되거든요.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