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지난여름에 쓰러진 나무들을 알고 있다
김남석 문학평론가
내가 아침마다 오르내리는 산책로는 한편으로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제법 그윽한 산세까지 갖춘 숲속 오솔길이다. 집을 나와 얕은 고개를 넘으면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묘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면 그 바다가 옆구리에 착 달라붙는 놀라운 장소였다. 아늑하고 고요한 길이어서, 이 길을 아는 사람들이 더는 늘지 않았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품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여름, 깊숙하게 숨어 있던 이곳도 태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곳곳에서 나무들이 쓰러졌고, 쓰러진 나무들은 대개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며칠에 걸쳐 나무를 잘랐고, 잘린 나무들을 며칠 동안 쌓아두었으며, 다시 며칠에 걸쳐 어디론가 가져갔다. 그러자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그루터기만 남았다.
태풍으로 잘린 나무가 있던 자리
그루터기와 나이테 흔적으로 남아
부산의 한 희극배우 죽음도
깊고 웅숭깊은 빈자리 드러내
잊어야 할 것은 잊을 수 있을 때
기억할 것도 기억할 수가 있어
어떤 그루터기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눈물을 닮은 나뭇진을 흘리곤 했다. 그들 삶의 흔적인 나이테도 선명하게 남겼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서 나이테 역시 서서히 흐려지긴 했지만, 나무들이 있던 자리만큼은 좀처럼 희미해지지 않았다. 그들이 있던 자리는 그 자체로 빈터가 되었기에, 나무들이 살았던 시간은 당분간 그곳에 고여 있을 수 있었다.
사람도 어쩌면 이러한 나무와 같지 않을까. 당당한 웃음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고 그 이상의 당당함까지 선사했던 한 희극배우의 죽음도, 쓰러진 나무처럼 그 빈자리를 표나게 드러내고 있다. 그녀가 떠나자 그녀의 자리가 깊고 그윽했으며 웅숭깊었다는 생각을 좀처럼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지난여름 부산 연극계도 연극 곁을 오래 지키던 이들을 아프게 떠나보내야 했다. 그들은 연극이라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길고 오랜 가지를 뻗어냈던 고목들이었다. 그들이 떠나자, 그들의 자리 역시 또 그렇게 빈 곳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주변에서 깊숙하게 자리를 차지하던 또 누군가가 떠날 것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나이테처럼 시간의 궤적을 품고 있을 것이고, 그들이 있던 자리는 당분간 빈터의 흔적을 숨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공간을 버리고, 오래 쌓았던 시간을 떠나,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면 남은 이들은 한동안 그들을 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난여름 태풍은 비단 나무만을 쓰러뜨린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 유리창을 깼고, 지붕과 간판을 뜯어냈으며, 차와 소중한 것들을 침수시켰다. 그러자 살아남은 자들은 그것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새롭게 갈아 끼웠고, 날아간 지붕을 다시 이었다. 차를 수리하거나 소중한 것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그러면서 지난여름의 태풍을 잊어갈 채비를 마치고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난 것들을 메워내려 한 것이다.
잊는다는 것은 때로는, 떠나간 것과 떠난 이를 기억하는 소중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을 수 있을 때, 기억할 것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기 위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현실에 매달리는 방식도 필요하다. 지난여름의 아픔을 빨리 잊을 수 있을 때, 그 이후 우리 앞에 다가온 일상을 착실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보내야 할 것을 보내자,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한 사람의 힘겨운 시간이 눈에 들어왔고, 대권을 거머쥐기 위하여 필사적인 후보의 안간힘도 보였다. 그들은 시간과 다투고 있었고, 자신의 삶을 더 깊게 거머쥐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수행하는 전투 아닌 전투를 지켜보면서,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옛 영화의 전언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사라진 것들이 늘 있음에도 삶은 경이롭다. 지난여름 강력했던 태풍이 오래된 나무에게 저질렀던 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