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트로이의 목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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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4년 전 이맘때 연구년으로 미국 미시간에 거주하고 있었다.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로 불리는 지역이다. 대통령 선거 당시 미시간의 시골을 가 보면 트럼프 후보 지지자들의 빨간 팻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학 광장에서는 힐러리 후보를 반대하는(그렇다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닌) 학생들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낯선 이방인 눈에는 트럼프가 당선될 것처럼 보였다. 미시간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는 나의 선거 전망에 코웃음을 쳤다. “미국에 온 지 반년도 안 된 친구가 미국 정치를 얼마나 안다고 그래?”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나의 우려 섞인 전망이 들어맞자 그 친구는 “미국은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니까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사회가 바뀌진 않아”라며 자신을 위안하는 듯한 말로 나를 다독였다.


4년간 미국과 세계 들쑤신 트럼프

거침없는 언행에 지지자들 열광해

독서 외면이 미국 반지성주의 초래

스마트폰·AI만 너무 믿어선 안 돼


미꾸라지 한 마리가 우물을 흐리듯 트럼프의 기이한 행적은 지난 4년 동안 미국 사회를 들쑤셔 놓았다. 이민자의 국가에서 반이민 정책을 내세워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장벽을 설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세계 경찰국가에서 고립 노선으로 돌아섰고, 무역에서도 우방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미국의 이익만 먼저 챙겼다. 한국이나 독일처럼 미군이 주둔하는 동맹국들에 대놓고 돈을 더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기후변화(지구 온난화)는 사이비 과학자들의 주장에 불과하다며 파리 협정에서도 탈퇴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바이러스가 별것 아니라며 마스크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표백제나 살균제를 인체에 투입하면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마저 했다.

이 모든 언행에 트럼프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참모를 단칼에 날렸고(You are fired), 주류 언론을 싸잡아 ‘가짜뉴스’라 비난했다. 오직 자신의 트윗만이 진실이라며 지지자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짧은 문장을 날렸다. 이런 그가 올해 대선에서도 7000만 표가 넘는 지지를 받았으니, 많은 사회과학자는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지식과 과학적 분석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에 전전긍긍했다.

이런 ‘트럼프 현상’의 실마리를 최근 〈반지성주의 시대〉라는 책을 통해 얻게 됐다. 저자인 수전 제이코비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임을 새삼 일깨워 줬다. 2006년의 퓨 포럼 연구조사에서 “미국의 법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성경이냐, 국민의 뜻이냐?”는 질문에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 60%가 성경이라 답했다고 한다. 공립학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는 여론이 진화론만 가르쳐야 한다는 것보다 두 배 더 많은 상황이다. 미국 성인의 20%는 여전히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확신하며, 지구 나이(아담에서부터 따졌을 때)도 6000년에 불과하다고 믿는 이들도 상당하다. 이러니 트럼프가 지구 온난화를 거짓말로 일축해도 문제가 되지 않고, 진화론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을 조롱할수록 보수층 지지자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에 거주할 때 이와 관련한 경험담이 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지식인 집단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주창하며, 편견이 섞인 언어적 표현이나 행동을 하지 말자는 운동을 펼쳤다. 그중 하나가 ‘메리 크리스마스’란 인사말이었다. 성탄절은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의미가 있고 이슬람 이민자나 여타 종교인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니 ‘연휴 잘 보내세요(Happy holidays)’라는 말로 대체하자고 했었고,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방송에서도 거의 정착되다시피 했다. 트럼프는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한다”며 이민자들이 외려 미국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해 겨울 미국인들은 ‘메리 크리스마스’와 ‘연휴 잘 보내세요’ 사이에서 주춤했다.

수전 제이코비는 미국이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된 핵심적인 이유의 하나로 책을 읽지 않는 경향을 꼽았다. 스마트폰(인터넷)으로 읽을거리와 볼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아졌지만, 사람들이 단편적인 ‘정보’를 추구할 뿐 심오한 ‘지식’은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음성 인식 인공지능(AI)까지 장착해 말만 해도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서 처리해 주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게 현대판 ‘트로이의 목마’라고 생각하면 기우일까? 지난주 한 경제신문이 주최한 ‘글로벌 인재포럼 2020’에서 AI 분야 세계 권위자인 마이클 조던 미국 UC버클리 교수는 “AI가 인간을 뛰어넘을 것이란 두려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조력자로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의 말마따나, AI가 ‘트로이의 목마’일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그러나 디지털 문명의 승리에 취해 가는 이웃이 너무 많다. 지구촌이 ‘트로이 성(城)’이 되지 않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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