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오래된 기록 속 낯선 만남
김남석 문학평론가
가끔 오르는 신선대는 부산에서도 비경을 자랑하는 명소이다. 그곳에서 부산항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200년 전에는 작은 포구였던 이곳이 왜 이토록 큰 도시가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면 그 기분에 맞장구라도 치듯, 200년 전 비사를 담은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1797년 10월, 윌리엄 브로우턴 함장과 승무원들은 영국 해군 소속 ‘프로비던스’호의 부속선을 타고 이곳 용당포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을 가졌던 최초의 영국인들이었다. 이 기념비는 윌리엄 브로우틴 함장의 부산 방문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부산항을 정밀하게 측량 관측했던 지점에 건립되었다.”
200년 전 비사 담은 신선대 비석
부산이 포구서 도시로 성장 이유 담아
영국 해군과 선조들의 낯선 만남
외국인과 소통하려는 의지 돋보여
코로나19로 외국과 단절된 현실
이전의 삶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
이 기념비는 200년 전 부산을 찾았던 오래된 손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다. 기록 속 낯선 방문자들은 느닷없이 이 자그마한 포구에 나타났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그 후 200년 동안 낯선 이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과의 교류가 이어졌고, 결국 지금의 부산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기념비는 그 시작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기리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 첫 만남을 기억하는 우리 선조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때 그들은 이 느닷없는 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상한 나라의 배 한 척이 표류하여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닿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랬습니다. 그들에게 국호와 표류하여 닿게 된 연유를 한나라, 청나라, 왜국, 몽골의 언어로 물어보았으나 모두 알지도 못했습니다. 붓을 주어 글로 써 보라고 하였더니 글자의 모습이 구름이 낀 산과 같았고 그림을 그려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이 기록은 조선인들이 용감하게 방문자를 향해 나아갔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소통하려 했다는 점을 증언한다. 특히 파란 눈과 높은 코를 가진 상대의 정체를 묻고 방문한 목적을 탐색했을 조선인의 모습은 다소 해프닝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호기심 많은 이들은 여전히 앞장설 것이고, 그들은 비슷한 질문을 시작할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나고.
이 질문은 기묘한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도 이러한 질문을 하거나 받거나 했던 기억을 최근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별다른 제약 없이 외국을 방문할 수 있었을 때, 거꾸로 외국인의 방문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을 때, 분명 우리도 상대의 이름과 나라의 정체를 궁금해했었다.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상대 언어에 막막함을 느끼기도 했고, 그들의 정체를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지난 1년은 그러한 기억을 앗아갔다.
다시 1년 전의 세상이 돌아온다면, 우리는 어떤 상태가 되어 있을까. 상대와 교류하는 법을 완전히 되찾기 전일 수도 있는 우리는, 어쩌면 200년 전 조선인들처럼 느닷없는 방문자로 인해 적지 않은 충격을 마음속에 각인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 1년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마무리해야 하는 12월에 접어들자,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역시 짙어지는 것을 느낀다. 아마 그 요점은 우리가 과연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일 것이다. 비록 서툴지라도 상대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하면서, 그들과의 차이를 되새기려 다시 시도할 수 있을까. 마음 속의 동요가 좀처럼 걷히지 않자, 신선대의 비석은 그날을 돌아볼 것을 정중하게 부탁해왔다. 그리고 자신 뒤로, 200년 전 당황스러운 만남을 시작으로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만들어 놓은 부산항도 넌지시 보여주는 듯했다. 아무도 찾지 않았으면 여전히 포구로 남았을 부산항을 증거처럼 내놓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