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가둔’ 자에서 ‘갇힌’ 자로
김남석 문학평론가
최근 한 기사에서 코로나 사태로 죽어가는 동물들을 소식을 읽었다. 코로나의 창궐은 인간 사회와 경제에만 충격을 가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칩거는 동물원 관람을 차단했고, 관람 수입 격감으로 인해 동물들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이에 동물원 측은 동물의 개체 수를 줄이거나, 배당하는 먹이를 줄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가뜩이나 씁쓸했던 마음에 더 큰 참담함을 불러일으켰다. 먹이가 턱없이 줄자 사자들은 갈비뼈를 드러내며 힘없이 앉아 있어야 했고, 그마저 어떤 동물은 살처분되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운명 앞에 놓여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코로나를 떠나, 동물원 설립의 정당성에 대해 묻도록 만든다.
동물원에 갇힌 다양한 동물들은
인간의 이익·오만이 만든 희생물
‘코리안 드림’ 찾아온 이주노동자
그들의 자유를 구속한 건 아닌지
누구에게도 억압 강요해선 안 돼
코로나 시대 ‘역지사지’ 자세 지녀야
동물원 설치는 동물을 인위적으로 가둘 수 있고 갇힌 동물을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특권 위에서 가능했다. 사자는 아프리카를 떠나 겨울이 추운 한국에 강제로 전시되어야 했다. 여름을 맞은 북극곰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얼음덩어리에 비참하게 몸을 내맡겨야 했고, 돌고래들은 수조도 아닌 좁은 사육장과 공연장을 오가며 죽을 때까지 뛰어올라야 할지도 모른다.
누가 감금의 권리를 인간에게 허용했을까. 이러한 특권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구를 제패하고 동물을 소유했다는 강자의 여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강자로서의 인간이 약자로서의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란 그렇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우리가 직면한 코로나 시대는 동물원이나 수족관의 존재 이유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거의 1년을 집에 갇혀 지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유폐했고 우리가 갇힌 곳이 대부분 집이었음에도, 우리는 활동의 기회가 제약되고 일정한 공간만을 허용받는 상황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평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했을 동물들은 심정은 어떠할까. 코로나 시대는, 지금까지 가두는 데에 익숙했던 이들이 역으로 갇혀 있는 이들의 심정을 경험하는 시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굶어 죽어간다는 동물들은, 가두는 데에만 집착했던 인간의 이익과 오만이 만든 희생물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다시 나아져서 사람들이 예전처럼 거리를 활보하게 되고 동물들이 굶지 않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동물원의 존립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마도 나의 자유와 구경과 열광을 위해, 누군가의 구속과 억압과 스트레스를 강요할 수 있는 특권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나아가서 인간이 지금 가두고 있는 것들이 비단 동물만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했으면 한다. 많은 한국인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제삼 세계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주는 대가는 그 이익에 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었기에 이 땅의 지배자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그 노동자들은, 자유를 구속당한 동물과 근본적으로 같다고 해야 한다. 열악한 기숙 시설, 낮은 임금, 반인간적 처우를 강요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하며, 그들을 우리에 가두는 데에 찬성했던 지금까지의 시각 역시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의해 구속당해 경험이 있다. 그 시기의 우리는 일제나 제국주의자들에게 포섭된 동물원 속 원숭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사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동물뿐만 아니라 그 어떤 존재에게도 그 존재의 의사에 반하는 억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진실 앞에 다시 겸허해져야 한다. 이러한 겸허는 코로나가 우리에게 일깨운 교훈이기도 하다. 언제든, 누구든, 그때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잃고 순식간에 좁은 곳에 감금될 수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