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정체 드러낸 '해안 포진지'…굳게 닫힌 태종대 땅굴 2부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기자가 무엇입니까. 권력 감시같은 묵직한 '스트레이트 펀치'만 날려야 합니까.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일상 속 미스터리, 궁금증을 풀어주는 '잽'도 던져야 합니다.
'동치미 막국수'처럼 속 시원하게 뚫어드리겠습니다. 끝까지 파고들 테니 무엇이든 댓글로 제보해주십시오.
<1부 요약>
40년 전, 부산 영도구 태종대에 일제강점기 지하벙커를 목격했다는 제보입니다.
1개 중대가 한꺼번에 머무를 만큼 내부가 넓었고, 쓰레기도 없이 깨끗했다고 합니다. 기억 속 모습이 맞다면, 그동안 잊혔던 부산의 '아픈 역사'가 스며 있지 않을까요.
취재팀은 태종산 길을 2시간여 헤맸습니다. 그리고 한 개울가 건너 언덕에서 거짓말처럼 땅굴을 발견했습니다. 입구만 가로 3m, 세로 4m. 제법 큰 굴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입구가 단단히 막혔습니다. 좁은 틈으로 본 내부는 컴컴한 '암실'입니다.
주경업 부산민문화연구원 대표는 태종대 동굴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5년 전쯤 영도구 동삼동 주민에게서 제보가 왔었습니다. 200명 정도 주민이 강제노역을 했는데, 동굴 안에서 모두 총살당하고 자신만 도망쳐 나왔다고…”
"태종사 안에 땅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난 22일 부산시로부터 들어온 추가 제보. 이전에 발견한 땅굴 바로 건너편에 작은 굴이 있다는 것. 취재팀은 전문가, 태종대유원지사업소 측과 현장을 다시 찾았습니다.
태종사 초입에 있는 작은 굴은 나무판들을 덧대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내부로 넘어갈 만큼 넓은 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 내린 바위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등 붕괴 조짐이 엿보였습니다.
김한근 부산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작은 굴을 단순 대피소로 추정했습니다. 군사시설이라 하기에는 크기가 작고, 탄약을 운반하기 위해 쓰는 레일 등을 깐 흔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종사 측은 일제강점기 '저장고' 정도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다만 태종산 다른 곳에 뚫린 굴들은 예전 '해안 포진지'로 쓰였다고. 직접 여러 굴 속에 들어갔던 100세 넘으신 스님의 목격담이라고 합니다.
작은 굴을 뒤로한 채 막혀 있는 건너편 대형 땅굴을 둘러봤습니다. 동행한 태종대유원지사업소 방준호 소장은 "최근 누군가 들어간 흔적만 있을 뿐, 안쪽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면서 "지금부터라도 역사적 가치 회복을 위해 힘쓰겠다"고 했습니다. 실제 땅굴 입구 오른쪽 아래를 보면 구멍을 낸 뒤 다시 메운 것처럼 콘크리트의 모양새가 확실히 달랐습니다.
땅굴을 천천히 살펴본 김 소장은 이곳을 '해안 포진지'로 추정했습니다. 규모를 봤을 때 남구 용호동의 '장자등 포진지'와 엇비슷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더불어 탄약고 등 추가 시설의 흔적도 있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포진지가 맞다면 땅굴 안에서 포를 위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시설이 주변에 있을 겁니다."
땅굴이 뚫린 방향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엔 대형 광장이 만들어져, 어떤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단순 방공호의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방공호는 'U'자 등의 형태로 땅굴 입구가 2개가 있어야 한답니다. 최근 '문현 금괴 도굴 사건' 취재를 위해 들어가 봤던 문현동 동굴이 'U'자형이었습니다. 태종대 땅굴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다른 입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김 소장은 땅굴 위 광장을 두르고 있는 배수로를 유의미하게 봤습니다. 땅굴 내부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산 비탈의 물길을 돌렸다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 장비가 배치되는 등 당시 땅굴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이 배수로는 1990년대 초 광장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있었던 배수로의 흔적을 따라 새롭게 정비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취재팀은 과거 태종대의 항공 사진, 관련 서적 등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영도구에 주둔 중인 53사단에도 문의했지만 "너무 오래돼 파악하기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태종대가 '해안 포진지'였음을 증명할 역사적 문헌을 발견했습니다. 김 소장이 찾은 부산시의 '일본 방위성 소장 부산주둔 일본군 자료집'이 그 주인공. 여기에 수록된 1940년대 추정 지도에는 부산 중구 포병연대를 중심으로 태종대, 청학동, 용호동, 감만동, 천마산에 중포병대가 표기돼 있습니다.
이는 과거 태평양전쟁 때 연합군을 막기 위해 부산항 주변으로 대규모 해안 포진지가 구축됐음을 의미합니다. 부산항 사방에서 쏜 대공포로 '화망(火網)'을 형성해 지나가는 전투기를 폭파하는 전략입니다.
더불어 지도에는 태종대 인근 조도, 봉래산 정상의 감시초소도 확인됐습니다. 불빛으로 적 전투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조명부대 모습도 보였습니다.
비록 발견은 못했지만, 태종대 땅굴 위로 실제 포대 시설도 있다고 합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김윤미 HK연구교수는 "실제 많은 병력이 배치됐기 때문에 포진지뿐 아니라 탄약고, 막사, 저장소 등의 시설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김 교수팀은 과거 일본이 일제강점기 관련 시설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자, 이에 대응하고자 태종대 땅굴 등의 '아픈 역사'를 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무산됐지만, 현재 콘크리트로 막혀 있는 땅굴 내부 진입도 추진했었다고 합니다.
김한근 소장은 "100년이 채 되지 않은 나무들, 울창한 수풀 속 길이 나 있는 곳을 잘 살핀다면 추가 시설물을 분명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부산항은 일본의 군사요새였습니다. 전쟁 물자가 마지막까지 오가는, 그래서 일본이 반드시 지키려 했던 항로였습니다. 일본 본토에 이어 연합군의 '2순위' 공격 목표였다고.
특히 대마도와 가까운 태종대는 이 항로를 방어할 '선봉장'이었습니다. 맨눈으로 동서남북을 정찰할 수 있고, 주민도 거의 살지 않아 작전 수행에 최적의 장소였다고 합니다. 실제 6·25 전쟁 때는 훈련장으로 쓰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육군이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태종대 땅굴에는 '아픈 역사'가 스며 있습니다. 천혜의 요새가 우리나라에 아픔과 설움을 안겨준 일본을 위해 쓰였습니다. 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주민들은 수많은 곳에 굴을 팠습니다.
전문가들은 지금부터라도 태종대 전반에 대한 유적 조사에 나서야 한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역사적 사료 등을 토대로 감춰진 포진지 시설물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는 단순히 시설물을 찾는 것이 아닌, 부산항 전반에 얽힌 일제강점기 역사 퍼즐을 맞추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그동안 행정기관에서 이같은 역사를 규명하지 않은 채 그대로 묻어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산 시민으로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 다음 주 3부에서는 땅굴과 관련한 '집단 학살' 제보를 추적합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촬영·편집=정수원·이재화 PD blueskyda2@busan.com
촬영·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장은미 기자 mi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