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공간 읽기] “모여서 함께 살자” 비틂이 가져다준 기발한 상상력
대연동 ‘모여가’
[시리즈 전문]
우리는 무수히 많은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도시, 숲, 바다, 길, 광장, 집 안…. 이렇게 수많은 공간을 경험하고 기억하고 또 잊어간다. 이 중에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공간은 건축이 만든 우리 삶의 공간일 터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집(건물) 지을 바닥을 다지기 전에 땅의 깊이를 먼저 생각해야 하며, 벽을 세우기 전에 이웃하고 있는 사람과 자연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 또한 천정을 덮기 전에 더 넓은 하늘을 의식해야 한다”고. 여기, 사람과 바람과 빛과 밤하늘의 모든 움직임까지 담으려 애쓰는 곳을 찾아 그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공간에 말을 걸어본다’ 랄까?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다양한 공간들을 접하면서 한 번쯤 ‘공간이란 무엇이며, 건축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모습이 있다. 빌라나 아파트, 다세대 주택의 모양들이다. 마치 벽돌을 찍어내듯 천편일률적인 모습. 내 집이나 옆집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차별성을 발견하기란 좀처럼 어렵다. 어쩌면 “똑같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집과 좀 다른 집에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살고 싶은데…. ” 이런 희망은 마치 상품처럼 거의 똑같이 찍어내는 아파트, 빌라 같은 공동주택에서는 그야말로 꿈이다. 한데 이게 현실이 된 다세대 주택이 있다. 바로 도시의 새로운 주거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모여가 주택’(이하 모여가·부산 남구 대연동)이다. 모여가는 흔히 부산 사투리 “모여가 살자(한데 모여서 살자)”라는 말에서 따왔다.
모여가는 2018년 11월 완공됐다. 지상 4층 철근 콘크리트구조에 연면적 819.83㎡. 이곳에 모여 있는 8세대 집은 크게 보면 한 덩어리 속에 있으면서 각기 다른 구조를 갖는다. 세대당 공간 크기는 평균 30평 안팎이다.
똑같은 빌라·다세대 모양 탈피
‘생각과 꿈이 같은 사람들’ 입주
8세대가 각각 다른 구조
공동 공간·자신들만의 공간
새로운 도시 주거 모델 제시
모여가처럼 세대별로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공동 주택은 외국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세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건물 외관으로는 세대별 다른 내부 구조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살짝살짝 열린 공간들을 통해 뭔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무엇보다 외관을 통해 모여가를 설계한 라움건축 오신욱 건축사의 색채가 짙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층층의 덩어리(메스)를 살짝 비틀었다는 느낌 말이다. 그에게 살짝 비틂(어긋남)은 ‘잘 드는 칼’이다. 기자도 처음엔 외형의 변화만 주고, 이에 맞춰 집의 방향만 살짝 비튼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좀 더 인심 쓰듯 “내부적으로 방 배치가 조금씩 다르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 살짝 비틂이 무한의 상상력을 가져왔을 줄이야. 문득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떠오른다. 그도 ‘틀어진 건물’을 설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여가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이야기는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집, 편안한 집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은 젊은 두 맞벌이 부부가 오신욱 건축사를 찾아가 집을 짓고 싶다고 얘기했다. 두 부부는 단독 주택에 대한 비용 부담을 덜어주는 공동 주택에, 아이들을 좀 더 아이답게 키우고 싶은 환경을 원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많은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당장 지을 땅이 확보돼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오 건축사는 평소 지인들끼리 모여 사는 공동주택을 꿈꿔 왔던 터라 젊은 두 부부의 생각을 듣고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건축주와 건축사는 함께 땅을 보러 다녔고, 지금의 모여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8세대에 들어갈 입주 가족이 처음부터 준비돼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알음알음 알게 된 몇몇 건축주는 카페 등 소셜네트워크와 설명회 등을 통해 생각을 함께하고, 꿈을 함께하는 입주 가족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8세대 25명의 ‘자신들만의 공간’을 위한 행복한 모임이 시작됐다.
육아에 대해 서로 고민하고, 서로의 생각과 상황, 육아 방법 등을 공유하면서 아이들을 위한 공동육아의 바탕이 되는 작은 공동주택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부모와 아이들은 친해지고, 누군가의 친구와 누군가의 동생, 오빠가 되었다. 특히 모여가가 완성된 후, 독특한 설계로 탄생한 수영장(여름), 테라스, 옥상, 마당 등은 아이들이 친해질 수 있는 매개 공간이 돼 주었다. 여기에 부모들의 재능기부가 수시로 더해서 모여가 8세대의 친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 이상이다. 103호 정혜경 씨는 “가족이 밖에 나가 외식하다가도 아이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모여가는 아이들에게 커다란 놀이동산이나 장난감 같은 곳이 됐다”고 자랑했다.
모여가 주택을 설계하면서 오 건축사는 특히 두 가지에 공을 들였다. 하나는 세대별 건축주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제각각의 매력과 장점을 가진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다행이랄까, 건축이나 디자인에 관심 있는 건축주도 제법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공사비의 과도한 투입 없이 각자의 가족 구성이나 라이프 스타일, 각 집의 예산, 그리고 건축주들이 가지고 있던 집에 대한 로망을 찾아주는 것에 집중했다. 어떤 집은 집 앞에 테라스를 두기도 하고, 또 어떤 집 앞엔 중정을 줘 자신들의 공간에 대해 충족감을 느끼게 했다. 402호 양은주 씨는 “우리가 의견을 내면, 건축사가 안 된다고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우리의 생각들을 들어 주려고 했던 그 점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오 건축사는 어느 층, 어느 위치, 어떤 방식의 집을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가정이 만족하는 분배’에 주력했다. 건축주끼리도 소통할 수 있게 MT(친목 모임)도 가졌다. 남의 집도 부럽지만, 내 집도 부러워지도록 했다. 소위 건축주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는 집 설계에 집중했다. 내 집 개념이 잘 드러나면 자존감이 오를 거로 생각했다. 물론 이 과정에선 어려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세대와 여러 차례 만나 소통해 나가면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 오 건축사는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스스로 공부도 많이 됐다. 이제 웬만한 프로젝트는 다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도 생겼다”며 웃으며 말했다.
함께 집을 짓고 2년여 작업 끝에 모여가는 완성 됐다. 시작은 8세대 25명에서 이제는 8세대 30명이 사는 곳이 됐다. 모여가에선 각자의 집을 통상 아이들 이름으로 부른다. 승준·승민이네, 지오·다나네 처럼 말이다.
8세대는 복층식이 두 집, 나머지 여섯 집은 모두 단층 구조다. 하지만 내부는 모두 다르다. 복층 구조를 가진 승준·승민이네 집은 1층은 놀이방, 가족실, 안방과 화장실, 2층은 주방, 거실, 아이방으로 되어 있다. 1층 가족실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놀이방은 모여가 아이들의 도서관 같은 곳이다. 방엔 책이 가득하다. 2층에서 옥상으로 가는 계단 위에는 ‘알파룸’이라고 지칭하는 아이들만의 특별한 공간이 눈에 띈다. 옥상을 통해 이웃집으로 쉬 드나들 수도 있다. 아이들은 곧잘 옥상을 이용해 들락날락한다.
지오·다나네는 문을 열면 마치 복도를 걷는 기분이다. 옆으로 아이방과 안방이 연이어 펼쳐진다. 안방과 거실 사이에 커다란 창문이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아이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주방은 거실을 마주 보고 설거지할 수 있게 돼 있다. 아이와 소통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곳곳에서 읽힌다.
세대별 구조가 모두 다른 특징 때문일까? 아니면 치열하게 고민한 만큼, 그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가 높기 때문일까? 모여가 건축주들은 다른 집도 부러워하지만 자신의 집을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모여가엔 공간적 소통이 가능한 장치도 많다. 공용 테라스, 발코니, 공동 마당, 수영장, 모여방 등이다. 어느 집의 테라스는 어느 집의 옥상과 연결돼 있다. 특히 모여방 옆 수영장은 여름이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모여방은 어른들이 수영장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모여가는 개인 소유라 언제든 매매와 권리 양도가 가능하다. 통상 협동조합형 공동주택은 소유권이 협동조합인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매매가 어렵다. 이런 점을 고려해 모여가 각 집의 소유권은 철저하게 개인 소유로 돼 있다.
또 다른 ‘모여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모여가 건축주들은 이렇게 권한다. “생각보다 큰 문제가 없다. 좋은 점이 너무 많다. 머릿속으로 구상만 할 게 아니라 직접 해보라”고. 이는 그만큼 모여가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의미다.
모여가 주택은 2019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2020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베스트 세븐에 선정됐다.
모여가 주택은 옆집이나 혹은 아래층, 위층 집과 똑같지 않게 이렇게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실현시킨 쾌거다. 이게 끝이 아니다. 더 나아가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집을 짓고 사는 꿈도 실현했다.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도시 속 공동주택의 변화를 시도했고, 또 도시의 새로운 주거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높다”고 말했다.
모여가는 형식상 다세대 주택이지만, 각각의 세대가 단독주택이기도 하다. 모여가는 공동주택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었다. 공동주택에 대한 일종의 대안 제시다.
모여가는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도시에서 집이란 바로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흔히 우리가 ‘집을 짓는다’라고 할 때 ‘짓는다’는 개념 속에는 단순히 물리적 형태를 만든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농사를 짓다, 밥을 짓다, 약을 짓다처럼 짓다 혹은 짓는다에는 ‘정성을 다한다’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다. 모여가가 그렇다.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공동기획:부산일보사·부산광역시건축사회
[에필로그]-모여가 주택
모여가 주택을 설계한 라움건축의 ‘라움’은 독일어로 ‘공간’이란 의미다. 이번 시리즈의 제목이 공간 읽기인데, 시리즈 시작을 공교롭게도 라움건축이 열었다. 모여가의 외관 건물색은 건물 설계자인 오신욱 건축사가 좋아하는 흰색이다. 모여가 외벽의 흰색이 마치 삶의 여백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비튼 건물은 가지런히 바로 잡힌 기존 건축물과 분명 다른 기운을 느낀다. 단정하다거나 질서 정연한 것과는 다르다. 좋은 의미에서는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 역동성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얼핏 까칠하게 보이는 오 건축사의 분위기 만큼이나 닮아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작품 기장 일광 카페 ‘투썸플레이스’의 1층과 2층도 건물이 서로 어긋나 있다. 한데 그 어긋남이 마치 새가 바다를 향해 긴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듯한 그런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공간은 갈수록 자본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모여가도 여기에서 벗어난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우리가 잊고 지내는 생명의 공간, 활력의 공간임은 분명하다. 이곳에선 바라봄, 감촉, 대화, 움직임, (아이들의) 소리 같은 단어들이 되살아난다. 문득 궁금해졌다. 10년 후, 모여가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