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절단 사건' 재심 청구 기각...법원 “재심 사유 안돼”
57년 전 성폭행을 시도하려는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유죄 선고를 받은 최말자(부산일보 2020년 5월 6일 자 10면 보도 등) 씨가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며 낸 재심 청구가 기각됐다. 형사소송법이 정한 재심 청구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며, 반세기 전에 이뤄진 사건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다. 재판부는 최 씨의 성 평등의 가치를 선언해 달라고 나선 용기와 외침에 커다란 울림과 영감을 줬다며 이례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부산지방법원 형사5부(권기철 부장판사)는 18일 최 씨가 낸 ‘혀 절단 사건’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최 씨는 18세이던 1964년 5월 6일 당시 21세 남성이던 노 모 씨의 성폭행 시도에 노 씨의 혀를 깨물어 저항했다. 부산지법은 성폭력 피해자인 최 씨에게 중상해 혐의를 적용해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최 씨는 끝까지 정당방위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재판 과정에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최 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용기를 내 부산 여성의전화와 상담을 진행했고, 지난해 5월 재심청구를 결심했다.
재판부는 최 씨의 재심 청구가 현행 형사소송법이 정하고 있는 재심 청구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형사소송법이 정하고 있는 재심 사유 중 하나인 무죄나 가벼운 죄를 인정할 증거가 있는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봤다.
권 부장판사는 “재심대상 판결의 범죄 사실에 적시된 중상해의 내용은 ‘발음의 현저한 곤란’”이라며 “청구인은 노 씨가 사건 이후 수술을 통해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했지만, 그의 언어 능력에는 실제 상당한 장애가 발생했다”고 판시했다. 형법상 중상해죄가 정하고 있는 상해의 범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최 씨가 재심 사유로 밝힌 검사의 불법체포감금과 협박, 법관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 씨와 최 씨 측 변호인은 사건 당시 검사가 수사단계에서 구속영장을 제시하거나 변호인 선임권을 고지하지 않고 구속했다고 억울함을 주장했다. 또 당시 재판부가 공판 진행 과정 중 키스 당하는 모습을 재연하도록 하는 등 직권을 남용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권 부장판사는 “청구인이 사선 변호인의 조력 속에 재판을 받았다”며 “공판 과정에서도 정당 방위에 의한 무죄를 주장했을 뿐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이나 협박, 자백 강요 등을 주장한 바 없다”고 설명했다. 검사의 불법 구금을 증명할 객관적이고 분명한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고도 봤다.
재판부는 법관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에 대해서는 “성차별 인식과 가치관 변화 등을 비춰 볼 때 반세기 전에 이뤄진 재심 대상 사건을 지금의 잣대로 판단해 당시 소송 진행이 법관의 범죄를 구성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날 재판부는 재심 청구를 기각하면서 이례적으로 재판부의 입장을 밝혔다. 권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청구인의 재심 청구를 기각하는 재판부 법관들의 마음이 가볍지 않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권 부장판사는 “열아홉 소녀가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입안에 들어온 혀를 깨문 것”이라며 “뿌리 깊은 성차별적 인식과 가치관이 지금만큼 있었다면, 청구인을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권 부장판사는 “재심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청구인의 용기와 외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커다란 울림과 영감을 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한수 기자 hangang@busan.com
김한수 기자 han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