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절단 사건’ 재심청구 기각, 법원 “용기와 외침은 큰 울림” (종합)
최말자 씨 ‘미완의 미투’
57년 전 성폭행을 시도하는 가해자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한 최말자 씨가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법원에 낸 재심 청구가 기각됐다. 재심 청구 요건에 해당하지 않고, 사회적 여건과 인식이 바뀐 상황에서 당시 판결을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다. 다만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내고 최 씨의 용기에 큰 울림을 받았다고 밝혔다.
부산지방법원 형사5부(부장판사 권기철)는 최 씨가 중상해죄로 처벌받은 사건에 대해 자신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면서 낸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57년 전 성폭행범 혀 깨물어
유죄 선고 받고 옥살이
2018년 “정당방위” 재심 청구
부산지법 “성차별 의식 바뀐
현재의 잣대로는 판단 어려워”
최 씨는 18세이던 1964년 5월 6일 경남 김해의 한 마을에서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데려다주려다 집 앞을 서성이던 21세 노 모 씨와 마주쳤다. 노 씨 때문에 친구들이 집에 가지 못하자, 최 씨는 친구들이 집에 갈 수 있도록 노 씨를 다른 길로 유인했다. 으슥한 밤길에서 둘만 남게 되자 노 씨는 최 씨의 배 위에 올라타 성폭행을 시도했다. 최 씨는 키스를 시도하는 노 씨의 혀를 깨물며 저항했다. 노 씨의 혀 1.5㎝가 잘렸다. 노 씨는 사건 이후 혀 접합 수술을 했다.
이듬해 열린 1심 재판에서 최 씨는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노 씨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구속 수사를 받은 최 씨는 구치소에 6개월 수감됐다.
최 씨는 2018년 부산여성의전화에 상담했고 지난해 5월 재심 청구서를 부산지법에 제출했다. 당시 재판에서 정당방위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부산지법은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심문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9개월여 만에 최 씨의 재심 청구가 현행 형사소송법이 정하고 있는 재심 청구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심 사유 중 하나인 무죄나 가벼운 죄로 봐야 할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권 부장판사는 “재심 대상인 1965년 당시 판결의 범죄 사실에 적힌 중상해 내용은 ‘발음의 현저한 곤란’”이라고 밝혔다. 권 부장판사는 “최 씨는 노 씨가 사건 이후 말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노 씨의 언어 능력에는 상당한 장애가 발생했다”고 봤다. 형법상 중상해죄의 상해 범위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최 씨가 또 다른 재심 사유로 주장했던 검찰과 법원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 부장판사는 “최 씨가 당시 사선 변호인의 조력 속에 재판을 받았고, 공판 과정 중에는 수사기관의 불법 행위에 대해 주장한 사실이 없다”고 판시했다. 법관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반세기 전 사건을 성차별 인식과 가치관이 변화된 지금의 잣대로 판단해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권 부장판사는 재심 청구 기각과 별개로 판결문에 재판부의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가 별도의 입장을 판결문에 포함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권 부장판사는 “재심 청구를 기각하는 재판부 법관들의 마음이 가볍지 않다”며 “열아홉 소녀가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문 것”이라고 사실상 최 씨의 행위가 정당방위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권 부장판사는 “재심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최 씨의 용기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커다란 울림을 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부산여성의전화 고순생 상임대표는 “이번 판결은 재판부가 당시 시대적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방어권도 보장하지 않은 판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한수·변은샘 기자 hangang@busan.com
김한수 기자 hangang@ , 변은샘기자 iamsa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