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체육·연예계 ‘학폭 미투’ 사태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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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에는 사회적 공소시효가 없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가 2020년 12월 9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학폭 피해 학생 전담기관 교육부 직접 운영 등 피해자 치유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가 2020년 12월 9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학폭 피해 학생 전담기관 교육부 직접 운영 등 피해자 치유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다시 세찬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바람이 분다. 2018년 2월 문화예술계에 휘몰아치고 정치권으로 번졌던 ‘성폭력 미투’가 아니다. 이번에는 고질적인 학교폭력(학폭)을 고발하는 미투가 강타했다. 학폭은 교내·외에서 학생 간에 일어나는 폭력 행위를 말한다. 지난달 유명 프로배구 선수들의 학창 시절 폭행이 폭로되면서 시작된 ‘학폭 미투’는 체육계와 연예계를 중심으로 현재 진행형이다.

학폭은 철없는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장난이 아니다. 피해 학생에게 큰 아픔을 주며 평생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기는 범죄 행위다. 가족까지 고통에 시달릴 수 있다. 가해자도 어떤 행위가 나중에 불리한 결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 효과 탓에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학폭 미투는 여실히 보여 준다. 학폭 근절을 위한 평상시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근절되지 않는 학폭 범죄

갈수록 잔인·흉포화

온라인서도 급속 확산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 줘

미투 폭로 사회 전반 확산

가해자에 부메랑 돌아와

처벌 위주 대책으론 한계

악순환 막을 근본책 마련

학교·가정 인성교육 절실

평소 학폭 폐해 일깨워야


■"나도 당했다" 잇따른 폭로

‘돈을 빼앗고 주먹으로 때리고 칼로 위협했다.’ ‘냄새가 난다며 옆에 오지 말라고 했다.’ 지난달 8일 프로배구단 흥국생명 소속 스타 선수인 이재영·다영 자매의 중학생 때 학폭 가해를 주장한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처음 올라왔다. 자매가 후배 선수들을 신체적·언어적으로 모질게 괴롭혔다는 것. 이 폭로가 잇단 학폭 미투의 시발점이다. 두 선수는 이틀 후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리며 비교적 빠르게 가해 사실을 시인했다. 이때만 해도 파문이 확대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자매는 같은 달 15일 소속팀과 대한배구협회로부터 각각 무기한 출전 금지, 국가대표 자격 무기한 박탈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도 이들의 과거 학폭에 대한 추가 폭로가 이어지고 대중의 공분은 거세지고 있다. 배구계가 영구 제명이 아닌 무기한이란 모호한 표현으로 두 사람의 복귀 가능성을 열어 뒀다거나 제 식구를 감싼다고 판단한 비판 여론이 팽배해서다.

학폭 미투는 남자 배구와 야구, 농구, 축구 등 다른 종목의 프로 스포츠로 확산됐다. 배우와 가수를 비롯한 연예인들에 대한 학폭 의혹도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거의 매일 새로운 가해자의 이름이 등장할 정도다. 내일은 또 누구일까. TV조선 ‘미스트롯2’ 준결승에 오른 가수 진달래가 과거 학폭을 인정해 중도 하차하는 등 학폭 연루자의 추락은 한순간이다. 이들 중 일부는 학폭 사실을 부인하며 진위 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학폭 미투가 일반인에게도 불붙는 모양새다. 근거 없이 악의를 가진 허위 폭로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경계할 필요성이 있다.


■과거 학폭을 고발하는 이유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폭 범죄는 유형이 다양하다. 신체적인 상해와 폭행, 감금, 협박, 공갈, 약취·유인, 성폭력, 언어적인 명예훼손·모욕, 온·오프라인상의 따돌림, 강요·강제적 심부름,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폭력 정보 등으로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 피해를 주는 행위 따위가 있다. 이 같은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는 길어야 5~10년이다. 더욱이 만 10세 이상~14세 미만의 형사 미성년자는 촉법소년에 해당돼 처벌할 수 없다. 10여 년이 경과한 어릴 적 학폭 행위를 지금 와서 법적으로 처벌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학폭 미투 사태가 인터넷과 SNS,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피해자와 가족이 오랫동안 잊기 힘든 고통을 겪은 만큼 뒤늦게라도 반드시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응징하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까닭일 테다. 학폭을 휘둘렀던 친구가 인기 스타가 되거나 유명해질 경우, 이를 본 피해자는 옛 아픔이 또렷하게 되살아나거나 비참한 심정에 빠지는 2차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때가 많다고 한다.

이에 따라 요즘 가해자를 엄벌하고 피해자는 국가와 사회가 적극 보호해야 한다는 개개인의 인식이 비등해진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학폭을 중대한 범죄로 여기고 문제점을 재조명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반면 정부와 교육 당국의 학폭 예방대책은 허술하고 사건 발생 이후 대응책마저 미흡한 데서 생긴 불신감이 미투 형태로 터져 나온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학폭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스페인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1859∼1909)는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역설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2000년대를 풍미했건만, 학폭은 사라질 줄 모른다. 학폭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4년 학폭을 막기 위해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 법이 시행된 지 1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학폭은 근절되지 않은 채 심각한 사회 문제의 하나로 꼽힌다.

교육부가 2019년 전국 초4~고3 학생 372만 명에게 학폭 경험을 질문한 결과, 무려 6만 명이 고통을 토로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초·중·고 운동선수 6만 3211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선 14.7%가 신체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합숙생활 속에 군대문화를 용인하기 쉬운 운동부가 체육계 미투의 원인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디지털 시대에 편승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고 전파 속도가 빠른 사이버폭력도 증가추세에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온라인상의 왕따와 금품 갈취 같은 사이버폭력을 당해봤다고 응답한 초등생 비율이 2019년 18.8%에서 지난해 25.8%로 대폭 늘었다. 중학생은 18.1%, 고교생은 14.7%였다.

학폭이 일상화한 셈이다. 이는 학업 성적 지상주의와 승리 위주의 엘리트 체육 풍조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대입과 진학을 위한 경쟁교육이 학폭 은폐와 묵인을 조장하는 측면이 강해서다. 이런 가운데 청소년들의 또래나 후배에 대한 폭력은 갈수록 잔인해지고 흉포화한다. 안타깝게도 어른을 뺨치는 수준일 때도 있다. 학폭 연령도 초등학생, 심지어 유치원생으로 낮아지는 경향을 보여 여간 걱정이 아니다. 교육 당국, 일선 학교와 교사, 학부모 모두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학교 담장을 넘어 온라인 공간에서 급속히 확산·진화하는 사이버폭력과 관련해 학교와 경찰의 전문성 제고와 적극적인 대응이 시급하다.


■예방·치유 위한 대책 마련해야

과거 학폭이 물의와 논란을 빚자 앞으로 가해자 처벌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세균 국무총리도 체육계 학폭 근절에 노력할 것을 강조했다. 배구계와 문화체육관광부는 가해 운동선수를 퇴출하는 방안 등을 발표했다. 연예·방송계 역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사후 조치가 없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만, 사후약방문이나 미봉책이 아닌가 싶다. 학폭이 체육계만의 문제가 아닌 데다 처벌은 현행 제도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학폭을 감추지 않고 가해자의 재범을 방지할 수 있게끔 교화 시스템을 내실화하는 게 급선무다. 피해 학생이 상처를 치유하고 자아를 사랑하며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돕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피해자는 학폭 트라우마로 자존감이 낮아져 계속 학폭의 먹잇감이 되고 일부는 극단적인 선택을 서슴지 않는다. 피해자의 11.7%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해 그런 선택을 시도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학폭 미투 사태를 계기로 국가와 사회가 힘을 합쳐 학폭을 예방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할 때다. 평소 학생들에게 학폭의 폐단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 주고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에게 닥칠 후폭풍을 일깨우는 토론 수업의 활성화 등이다. 사회와 가정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폭은 가해자와 피해자는 물론 두 가족을 파괴할 수 있는 범죄다. 언제든 가해자의 삶까지 망가트리는 안 좋은 꼬리표가 붙을 수 있으므로 사회적인 시효는 없다고 봐야 한다. 반드시 학폭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 이유다. 지난 2일 각급 학교가 일제히 개학했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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