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갈릴레이는 왜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에 묻혔을까
[유럽 인문학 기행-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과 갈릴레이
피렌체의 이른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가벼웠다. 밤잠을 설친 사람의 머리조차 금세 맑게 만들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의 울음소리도 마찬가지로 상큼하고 경쾌했다.
신선한 아침 대기를 뚫고 서둘러 뛰어가는 발걸음이 있었다.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봄꽃들의 달콤한 향기도 그 발걸음을 붙잡거나 늦출 수 없었다. 매우 가볍고 산뜻한 소리로 보아 대단한 기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발걸음의 주인공이 달려간 곳은 피렌체 아르노 강 남쪽 아르체트리에 있는 포지오 임페리알리 저택이었다. 이곳은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대공 코시모 2세와 그의 가족이 살던 곳이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대공 전하를 서둘러 뵈어야 한다. 내가 밤새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는지를 알려드리면 깜짝 놀라면서 대단히 기뻐하실 것이다.”
발걸음의 주인공은 환희와 조급함이 뒤섞인 목소리와 함께 포지에 임페리알리 저택의 문을 힘차게 두들겼다. 잠시 후 저택 안에서 삐걱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 오늘도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먼 길을 달려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대공 전하께는 바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꼭두새벽이라고 해도 좋은 이른 시간에 포지에 임페리알리 저택을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그는 전날 밤 포지에 임페리알리 인근에 있는 집에서 천체를 살펴보다 특이한 별의 움직임을 발견했다. 그 사실을 후원자인 코시모 2세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기 위해 겨우 사물을 분간할 정도로 날이 밝은 시간에 포지에 임페리알리 저택으로 서둘러 달려간 것이었다.
■스승과 제자
갈릴레이는 1564년 피렌체 서쪽 피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천재로 소문난 그는 스물세 살 때 피사대학교 교수가 됐다. 그곳에서 세계 최초로 진자를 발명했지만, 5년 뒤 자신을 시기한 예수회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파두아로 이사한 그는 18년 동안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렸다. 수학을 배우러 온 학생들 중에 피렌체 출신의 코시모 2세라는 어린이가 있었다. 나중에 자라서는 성격이 매우 온화하고 관용을 베풀기를 좋아한데다 교육을 많이 받아 학문을 즐겼다는 평가를 받은 학동이었다.
코시모 2세는 스승 갈릴레이를 매우 사랑했고, 그의 실력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그는 스승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피사에서 쫓겨난 일을 보면 앞으로도 선생님의 인생은 쉬운 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피렌체 대공이 되면 선생님을 평생 보호하면서 학문의 길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모시겠습니다.”
코시모 2세는 열여덟 살이던 1609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의 뒤를 이어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의 대공 자리에 올랐다.
어릴 적 스승을 잊지 않고 있던 그는 이듬해 당시 마흔여섯 살이던 갈릴레이를 피렌체로 모셔갔다.
“선생님, 제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선생님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피렌체에서 마음껏 천재성을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코시모 2세는 갈릴레이에게 아르체트리에 있는 저택을 선물했다. 또 연봉 1000스쿠도를 주기로 하고 ‘대공의 수석 수학자’로 임명했다.
갈릴레이는 23년 동안 이 자리에 있으면서 자유롭게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후세 사람들은 ‘코시모 2세가 아니었다면 갈릴레이의 수많은 과학적 업적은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갈릴레이가 피렌체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회는 코시모 2세에게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갈릴레이는 학문이라는 미명하에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이단자입니다. 그를 보호하시면 전하께도 결코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를 당장 피렌체에서 쫓아내십시오.”
코시모 2세는 예수회의 항의에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는 피렌체로 찾아온 예수회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갈릴레이가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사람인지,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인지는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피렌체에 정착한 직후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탑을 세우고 망원경을 발명했다. 멀리 있는 물체를 크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인 망원경을 본 코시모 2세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발명하시다니요! 정말 갈릴레이 선생님은 천재이십니다.”
“망원경으로 어제 밤새도록 하늘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달을 관측했지요. 넋을 잃을 정도로 환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았다. 그는 새로운 천문 현상을 발견하면 늘 코시모 2세에게 먼저 알렸다. 날이 밝으면 흥분된 표정으로 코시모 2세에게 달려가 밤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이후에야 새 발견 내용을 정리한 뒤 포지오 임페리알리에 학자들을 모아놓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후세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추정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계에 있는 작은 행성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코시모 2세가 가장 먼저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갈릴레이는 1610년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을 피렌체로 초빙해서 안전을 보장해주고, 학문을 계속 연구할 수 있게 해 준 코시모 2세의 후의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 위성들에 ‘메디치가의 별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극의 시작
갈릴레이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1620년 겨우 서른 살에 불과하던 코시모 2세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도 2세가 대공 자리에 올랐다.
새 대공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할머니 크리스틴과 어머니 마리아 마달레나가 섭정으로 피렌체를 다스렸다. 두 여인은 사치를 즐기는 데 치중했고, 국정은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피렌체의 달라진 정치 상황은 곧바로 갈릴레이에게 악영향을 미쳤다.
코시모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23년 우르바노 8세가 새 교황이 됐다. 그는 피렌체 정부에 종교 재판관들을 보내 갈릴레이를 로마로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갈릴레이의 주장을 이단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갈릴레이를 20년이나 보호한 코시모 2세와 메디치 가문을 증오하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로마로 가셔야 하겠소이다. 당신이 이단인지 아닌지 종교재판을 통해 결론을 내겠다는 게 교황 성하의 생각이십니다.”
“지금 저는 몸이 너무 불편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갈릴레이는 건강을 핑계로 로마행을 잠시 미룬 뒤 코시모 2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도 2세는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겁이 많아 교황과 맞서기를 두려워했다.
이후 갈릴레이는 잘 알려진 대로 종교재판에 끌려가 무릎을 꿇고 오류를 철회했고, 자신의 이론이 엉터리라고 발표했다. 종교재판소는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교황은 잘못을 시인한 일개 수학자 겸 천문학자를 감옥에 넣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고 그를 로마의 한 저택에 연금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갈릴레이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피렌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의 학문 활동을 자제한 채 코시모 2세로부터 선물 받았던 아르체트리 저택에 은거하며 살았다.
그는 수녀였던 외동딸까지 이듬해 잃고 외롭게 살다 결국 1642년 1월 아르체트리의 저택에서 눈을 감았다.
페르디난도 2세는 갈릴레이를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메디치 예배당에 묻었다. 살아 있을 때에는 갈릴레이를 보호해주지 못했지만, 눈을 감은 마당에 무덤 하나만은 제대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스승에게 마지막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페르디난도 2세는 갈릴레이의 무덤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지만 교회의 반대에 부닥쳐 포기했다. 세월이 흘러 1737년에야 메디치 가문은 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워줄 수 있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