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기증은 ‘나눔’을 ‘행복’으로 되돌려받는 일이에요”
부산 장기기증운동 첫발
1992년 부산 금정구 장전동 ‘선아원(현 선아의 집)’에 중구라는 소년이 있었다. 선아원의 다른 친구들처럼, 중구는 장애가 있었다. 지적장애에다 청각장애까지 있어 말을 못 했다. 당시 30대 초반의 신학교 학생이었던 이태조(61) 목사는 정기적으로 선아원에서 봉사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그의 눈에 중구가 들어왔다. 이 목사는 “모든 친구들이 목욕을 하러 가는데, 중구만 빠졌기에 물어보니 신부전증으로 혈액 투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부산 1호 ‘생전 장기 기증’ 이태조 목사
30대 때 ‘신장’·40대 땐 ‘간 60%’ 나눔
꺼져 가던 생명 살려… “평생 기쁨으로”
수혜자 ‘고마움’ 표현에 오히려 ‘감사’
반대하던 가족들도 ‘기증’ 함께 하기로
이후 이 목사는 일주일에 2~3차례씩 중구의 병원 길에 동행했다. 그곳에서 여러 장애로 가냘프진 10대 소년이 주사기를 꽂은 채 몇 시간씩 신장투석을 받으며 힘들어하는 걸 지켜봤다. 신장 손상이 어떤 병이고, 신장을 기증받으면 그 고통이 끝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마침내 자신의 신장으로 중구의 아픔을 덜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장기 기증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주변 설득도 쉽지 않았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질책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설득하기 힘들었다. 이 목사는 “아들은 교회에 다녔지만,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다”며 “장기 기증 이야말로 자비가 아니겠느냐는 논리로 설득했다”고 말했다.
수술 날짜가 잡히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때까지 부산에선 생전 장기 기증 수술이 없었다. 여러 의료진이 동원됐고, 수술 준비도 철저해야 했다. 그렇게 1993년 5월 이 목사는 동아대병원의 수술대에 올라, 부산 1호 생전 장기 기증자가 되었다. 이 목사는 “주위에 경험자가 없으니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없어, 너무나 답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의 신장은 중구에게 갈 수 없었다. 중구는 수술 두 달 전인 그해 3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7살이었다. 3월 이 목사의 일기장에는 “오랜 기다림에 지쳐버린 중구”, “마음껏 뛰어놀지도, 고함 한 번 크게 못 지르고 아픔과 소외가 없는 곳으로 떠났다” 등의 구절이 적혀있다. 당시 장기 기증 문화가 성숙해 있었다면, 중구도 일찍 수술을 받아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누리지 않았을까. 이 목사는 지금껏 이런 안쓰러움을 안고 살아왔다.
중구는 떠났지만 장기 기증은 그에겐 축복이었다. 이 목사의 신장은 당시 31세의 여성에게 전해졌다. 연락은 금지돼 있지만, 건너건너 수혜자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고 한다. 이 목사는 “몇 년 뒤 신혼여행을 갔을 때, 수혜자로부터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내용의 메시지가 왔다”며 “그분도 생명을 나눠 준 이에 대한 고마움을 품고 살아가는 것 같아 감사했다”고 말했다.
목사가 된 그는 2005년에도 간의 60%를 나눠 말기 환자의 생명을 구했다. 이번엔 아내가 반대했지만, “강단에서 사랑은 실천이라고 설교하는데 고통받는 이를 어찌 외면하겠냐”고 설득했다. 2차례 기증에도 이 목사는 매우 건강하다. 신장 기증은 3일에서 일주일 사이에, 간 기증은 2주 정도 만에 퇴원한다. 기증을 해도 몸은 곧 회복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눔의 기쁨은 평생이라고 이 목사는 말한다. 그걸 옆에서 지켜봤기에 그렇게 반대했던 이 목사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까지 모두 장기 기증 서약에 서명했다.
지금 그는 경북 상주에서 장애인 등과 함께 지내며 작은 교회를 이끌고 있다. 콩팥선교단 사무장 등을 맡으며, 장기 기증 문화를 확산하는 일도 놓지 않고 있다. 이 목사는 “아들이 ‘아빠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할 때 길잡이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며 “장기 기증은 나눔의 실천이 행복으로 되돌아오는 행위”이라고 말했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