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지역문화사를 풍성하게 하자
김상훈 문화부장
근대 개항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문학, 미술, 무용, 음악,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그러나 부산에서 활동했거나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업적에 대한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부산 작고·원로 예술인들의 삶과 업적을 조명한 아카이빙 첫 성과물이 나왔다. ‘의인 윤정규의 아카이빙 구축을 위한 자료수집 및 기초연구’, ‘연극연출가 허영길’, ‘피아노의 숲-세계 최고령 피아니스트 제갈삼의 삶과 음악’이다. 부산문화재단이 지난해 시작해 2024년까지 연차적으로 진행하는 부산예술인 아카이빙 사업인 ‘부산의 삶, 예술로 기억하다’의 첫 번째 결실들이다.
부산 작고·원로 예술인 조명
아카이빙 성과물 의미 있어
시민이 손쉽게 활용하게 해야
문학·미술과 공연예술 장르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 과제
부산시 지속적 관심과 지원 필요
소설가 윤정규 아카이빙은 요산 김정한, 향파 이주홍의 다음 문학세대인 윤정규로 문학사 조망의 시야를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연극연출가 허영길 아카이빙은 극단 부산레퍼토리시스템을 창립한 부산 1세대 연극인 허영길의 삶과 연극 활동을 보여준다. 제갈삼 피아니스트 아카이빙은 부산 1세대 음악가로 지난해 95세에 최고령 피아노 연주로 세계 기네스 기록에 도전한 제갈삼 교수의 삶과 음악을 다뤘다.
아카이빙 연구팀들은 해당 예술인의 저서, 악보, 공연 팸플릿, 언론보도 기사, 사진, 동영상, 평론, 증언 자료 등을 폭넓게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펼쳤다. 이번에 나온 결실들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산문화예술계의 사표로 기릴 만한 예술인들의 치열한 예술혼을 복원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무엇보다 구축된 아카이빙 자료를 시민이나 연구자들이 손쉽게 접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온라인 콘텐츠로 가공해 자료 접근성을 높이고 전시회·세미나 개최, 공연콘텐츠의 기초자료 사용, 지역화 예술교과서 제작 등 다양한 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부산문화재단 아카이빙 사업은 지역 문화예술 아카이빙을 어떻게 확장해갈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문학의 경우 부산문학사의 체계적 아카이빙을 수행할 콘트롤타워로서의 부산문학관 건립 추진이 매우 중요해졌다.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는 “부산문학관을 개소하기 전부터 아카이빙 구축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학 아카이빙 관련 추진위원회를 빨리 조직해 부산 문학의 연대별, 장르별 자료 체계를 만들고 이에 바탕해 문학관 설계 때부터 전시공간 디자인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 장르의 경우, 디지털 미술 아카이브 구축 사업이 지난해 첫발을 뗀 상황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지난해 7월 부산시 3차 추경에 올린 ‘미술자료관리시스템 구축’ 예산안 1억 6000만 원이 부산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예산안 통과로 부산시립미술관 미술정보센터가 생긴 지 12년 만에 전시 리플렛, 작품 스케치, 전시 포스터, 작가노트, 사진, 친필 편지, 부산 미술 관련 기사 등 자료 5만여 점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길이 드디어 열렸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부산시립미술관이 희망하는 대로 2023년 미술 자료 5만여 점을 온라인으로 검색하고 자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아카이빙 구축 예산 지원과 ‘소장품자료 관리팀’ 신설 등 인력 확충이 지속해서 이뤄져야 한다.
문학과 미술 장르는 부산문학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아카이빙을 수행할 주체가 분명하다. 반면 무용, 음악, 연극 등 공연예술 분야는 콘트롤타워 역할을 할 아카이빙 주체가 모호하다. 공연 예술의 경우 사진, 팸플릿, 공연 녹화 영상 등 예술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갖고 있지만 개인이 관리하기에 한계가 있다. 경성대 배학수 철학과 교수가 미국 뉴욕에서 겪은 경험이 참고가 될듯하다. 배 교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뉴욕시립발레단, 줄리어드 음대 등이 있는 링컨센터를 예로 들었다. 링컨센터 부속 건물인 ‘공연예술 공립도서관’에는 현대무용, 발레 공연, 오페라 등 공연 영상 자료와 오디오 자료가 비치돼 있다. 관련 공연을 보기 전에 전문가들은 이 도서관을 방문해 악보를 보기도 하고, 시민들은 오페라, 발레 등 관심 있는 공연 정보를 미리 접한다고 한다. 배 교수는 뉴욕 사례처럼 부산에서도 지역 도서관들이 주체가 돼 공연예술 아카이브 구축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제대로 된 아카이브 관리 시스템 구축은 시민들이 더 좋은 공연과 전시를 즐기고, 연구자들이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밑바탕이 된다. 지역문화사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에 대한 부산시 등 문화행정 주체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neato@busan.com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