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의 신경인류학] 언어와 인간
신경인류학자·정신과 전문의
언어는 배우는 것일까? 아니면 타고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는 ‘말’이다. 예전에는 전자의 주장이 대세였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을 배우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는 동물에게 말을 가르치려는 과감한 시도로 이어졌다. 동물은 왜 말을 못 하는가?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말을 가르치면 동물도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인간의 의사소통 도구지만
특정 집단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도
지역·세대·남녀 등 숱한 경계 만들어
서로의 언어 경청·배우는 지혜 필요
그러나 야심 찬 시도는 실패했다. 간단한 어휘를 가르칠 수 있었지만, 복잡한 문법은 배우지 못했다. 인간은 만 세 살만 되어도 무려 1000개의 단어를 구사한다. 이를 조합하여 자유자재로 의사를 표현한다. 그러나 침팬지나 고릴라는 아무리 노력해도 100여 개 이상의 단어를 좀처럼 습득하지 못한다. 게다가 대개 단순한 모방에 불과하다.
언어학자 놈 촘스키는 인간의 마음에 선험적인 문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수천 개가 넘는 인간의 다양한 언어. 그러나 이는 모두 보편문법에 기반하며, 언어의 다양성은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쉽게 언어를 배울 수 있지만, 비인간 동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어렵다. 실제로 언어가 없는 부족은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 물론 복잡한 통사 구조를 구사하는 동물도 아직 찾지 못했다.
최근 모 대학교 학생이 ‘금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교수에게 항의하는 일이 화제가 되었다. ‘금일’의 뜻을 ‘금요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대중의 반응은 다양했다. 대학생의 한심한 어휘력을 한탄하는 이도 있고, ‘금일’은 한자어니까 ‘오늘’이라고 했어야 마땅했다는 이도 있다.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학생이 교수를 공격하기 위해, 그의 ‘말’을 걸고넘어졌다는 것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지만, 동시에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도 한다. 인간은 ‘우리’와 ‘남’을 가르려는 편견과 배제의 원시적 본성이 있다. 집단을 나누는 기준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바로 외모, 관습 그리고 언어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다른 사람’으로 간주한다. 아마 원시 사회에서는 제법 효율적인 전략이었을 것이다. 집단 간 교류가 적던 시절이다. 다른 언어를 쓴다면 분명 다른 부족이다. 다른 부족이라면 일단 조심하는 편이 유리하다. 점점 같은 집단에 속한 이들은 같은 말을 쓰고, 다른 집단에 속한 이들은 다른 말을 쓰게 되었다. 다양한 언어가 진화한 이유다.
사투리를 통해 집단을 나누고, 은어를 통해 무리를 가른다. 성별과 세대도 종종 언어를 통해 나뉜다. ‘나는 호남 사람이요’라는 말을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말하면,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을 것이다. 말의 내용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의 차이를 통해 상대의 소속을 가늠하는 것이다. 열심히 서울말을 배운 유학생. 그러나 고향 친구를 만나면 원래의 사투리로 돌아간다. 새로 배운 ‘서울말’을 고집하면 아마 친구로부터 핀잔을 들을 것이다. 인류는 보편문법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언어를 통해 집단을 가르고 나눈다. 그리고 이는 흔히 비극으로 이어졌다. 관동대지진 때 수많은 조선인이 억울하게 학살되었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가르는 기준은 ‘일본어가 유창한지’ 여부였다.
우리 사회의 갈등도 그렇다. 예전에는 평안도나 함경도 말을 쓰면 빨갱이로 몰기도 했다. 한때는 전라도 혹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서로 경계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러한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치인도 있었다. 이제 지역 갈등은 잠잠해지고 있지만, 느닷없이 남녀 갈등, 세대 갈등이 비등하고 있다. 역시 언어를 통해 나와 남을 나눈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언어가 ‘버릇없고 천박하다’라며 평가절하한다. 반대로 신세대는 ‘금일’이라는 케케묵은 한자어를 사용하는 꼰대라며 욕한다. 남성은 소위 ‘김치녀’의 말을 타박하고, 여성은 소위 ‘한남’의 말을 나무란다. 상대가 사용하는 ‘말’이 ‘잘못된 말’이라며 서둘러 규정짓는다. ‘잘못된 말’이니, 당연히 경청할 생각은 전혀 없다.
분명 마감을 넘긴 과제로 인해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금일’이라는 말로 선생을 공격할 일은 아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금일’이라는 말을 ‘감히’ 사용했다는 것일까? 학문 활동의 상당 부분은 ‘모르는 말’을 배우는 것인데, 이제는 대학교에서도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세상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언어는 타고난 것이면서, 동시에 배우는 것이다. 인류는 보편적 언어 본능을 가지고 있다. ‘너희 말은 틀렸고, 우리 말은 옳다’고 할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쓰는 말은 모두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이다. 서로의 말을 열심히 듣고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