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이건희 미술관'을 바라는 '지방'을 위한 항변

김영한 기자 kim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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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경제부 산업팀장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을 지켜보는 지방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고 서글프다. 서울 밖 사람들은 자주 봐 온 일이지만 이번 일도 ‘지방’은 떼를 쓰고 구걸하는 처지이고, ‘서울’은 “수준이 안 되는데 숟가락 얹느냐” 식으로 콧대를 세우는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4월 말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국가에 2만 3000여 점에 달하는 미술품과 문화재를 기증하고, 가장 먼저 박형준 부산시장이 5월 초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건희 미술관, 부산에 오면 명소가 됩니다’는 글을 올리며 부산 유치를 공개 선언한 뒤로 한달 남짓 만에 전국 각 지자체들이 경쟁에 가세했다.


서울선 ‘지방 수준 안 된다’ 시각

30개 지자체 뛰어든 배경 살펴야

문화 균형발전 정부 의지 시험대

근사한 ‘미술 도시’ 만들 기회로


이런 경쟁에 대해 상당수 서울 언론은 ‘각축전’ ‘쟁탈전’ ‘싸움터’ ‘이전투구’로 규정하고 있다. ‘비루한 숟가락을 얹는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후안무치하다’ 등 격한 표현까지 동원해 지방의 유치 논리를 깎아내리기 바쁘다.

미술 전문가들은 점잔을 빼며 길게는 청동기 시대 유물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이건희 컬렉션’ 규모를 볼 때 이를 감당할 충분한 전문가나 학예연구원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엔 대개 지방이 감당할 수 없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세계 미술 흐름을 볼 때 한 곳에서 다양한 시기와 장르의 미술품을 전시·보관하는 백화점 식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은 저개발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라는 ‘조언’도 있다. 이 역시 특정 지역에 대형 건축물 하나 짓는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투다.

지방이 자존심 상하는 지점은 이런 지적을 반박할 논리가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다. 지자체들은 ‘북항 등 문화 메카에 미술관을 짓겠다’(부산시), ‘구청사를 내놓겠다’(해운대구청), ‘2500억 원을 지원하겠다’(대구시) 등 건물이나 부지 확보 청사진만 내세우지, 기증자의 뜻을 기리는 방식이나 운영 문제에는 답이 없다. 일부 지자체의 경우 운영 능력이나 여건과 상관 없이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 ‘활용’ 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도 받는다.

서글픈 것은 지방이 그동안 미술을 대해 온 태도 때문이다. 서울 이외 지역 공·사립 미술관은 직원 한 명을 뽑으려 해도 마땅한 지원자가 없어 비전공자를 뽑기 일쑤다. 인구감소로 학생 수가 줄어 정부 정원 조정 압박이 들어오면 지방 대학들은 미술학과를 비롯한 예술학과부터 폐과시켰다. 기존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제대로 관리를 못해 비가 오면 빗물이 줄줄 새서 양동이를 대고 물을 받아야 곳도 있다. 부끄럽게도 지난해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방도 공정한 경쟁을 하자고 큰소리치고 싶지만 공정한 기준으로 승부를 가리자면 서울을 이길 곳은 없다. 문화관광체육부가 이건희 미술관 결정의 주요 기준이라고 밝힌 접근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구의 절반 넘게 몰려사는 수도권 말고는 대안이 없는 셈이 된다. 전문 인력이나 인프라를 따져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건희 미술관’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지방 소도시도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에 뛰어들게 한 배경부터 살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유치 의향을 밝힌 지자체만 30여 곳이라고 한다. 강원도만 빼고 사실상 전국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대다수가 미술관만 가져오면 ‘소멸 도시’ 신세를 벗어나거나 ‘제2의 빌바오’가 될 수 있다고 꿈꾸고 있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미술관에서 일할 전문가들도 찾아올 유인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건희 미술관’은 정부의 문화 영역에서의 균형발전 의지를 확인하는 시험대로 떠올라 버렸다. 유치에 뛰어든 지자체들은 균형발전을 제1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사실 지방마다 긴 시간 문화 육성에 공을 들였지만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하거나 산업적 성장을 이뤄낸 곳은 거의 없다. 부산만 해도 영화도시를 내세웠지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만 ‘반짝 영화도시’가 되는 신세다. 역량 부족을 지적해도 감수해야 하는 처지다. 문화의 균형발전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 정부의 의지와 지원이 절실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은 이번에 ‘이건희 컬렉션’ 중 18점을 기증받고 나서 평소 하루 50~60명이던 관람객이 300여 명으로 늘었다. 박수근미술관 말고도 제주도 이중섭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전국 5개 지방 공공 미술관이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받으면서 전시시설을 확충하는 등 고무돼 있다고 한다. ‘이건희 미술관’ 효과를 엿볼 수 있는 작은 사례다. 한국에 서울 말고 새로운 ‘미술 도시’가 하나 생겨 더 근사한 일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kim01@busan.com


김영한 기자 kim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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