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배웅] 2화 “누나만 찾다 하늘로…‘광주 891번’ 숫자가 돼버린 동생”
해군복 차림의 건장한 청년. 동생하면 떠오르는 모습이다. 김경숙(63) 씨는 어머니가 쥐어준 동생 길현(57) 씨의 사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너무 멋지다. 평생 바다에서 늙어라”며 동생을 응원했던 김 씨. 하지만 동생은 그 말을 따르지 못했다. 사진은 사라졌고, 거짓말처럼 동생은 누이 곁을 떠났다.
조현병·치매 앓던 해군 출신 동생
요양원 집단 발병 때 감염
유일하게 알아보던 누나 경숙 씨
항암치료로 발길 뜸하면 통곡
사망 후 낙인 싫어 ‘폐렴’ 기록
숫자로 기억되는 현실 가슴 아파
사망자·유가족은 죄인 아냐
■ 엄마 따라 하늘로
올 1월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광주에 내려오자 희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 상태가 호전돼 응급 중환자실(음압병실)에서 일반 중환자실로 옮긴다는 연락이었다. 광주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던 동생은 지난해 12월 22일 코로나에 감염됐다. 광주 요양시설 첫 집단발병이었다.
22명 중 1명. 동생은 초기엔 다른 환자들에 비해 상태가 괜찮았다. 걸어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러다 폐에 물이 차 온몸에 호스를 5~6개 달아야 했다. 고비를 넘긴 1월 19일, 한 달여 만에 만난 동생은 눈 깜박임으로 누나와 대화를 나눴다. “다 나으면 맛있는 거 먹자.”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엿새 뒤 상황이 다시 악화됐다. 간병인의 연락을 받고 급히 뛰어간 1월 25일 자정, 동생은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두 번의 심정지가 왔다. 김 씨는 약물 투여와 CPR 동의서에 사인을 하며 중환자실 입구에서 밤을 지샜다. 7시간 뒤 사망선고를 하려는 의사를 따라 비로소 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채였다.
동생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단 흔적이었다.
“팔 다리가 대나무 같았어요. 사람 뼈가 그렇게 얇은 줄 처음 알았죠.”
임종 순간, 고인의 귀에다 얘기를 하면 눈물을 흘리거나 눈을 깜박인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김 씨는 귀엣말로 얘기도 하고 열심히 손을 매만졌다. 동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1년차 레지던트가 사망선고를 내렸다. 사인은 ‘폐렴’. 완치 판정만 안 받았을 뿐 코로나는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
하필이면 그날 전남대병원은 북새통이었다. 광주에 또 다시 집단발병이 터져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병원에선 나가라고 하는데, 받아주는 장례식장이 없었다. 병원은 장례식장으로, 장례식장은 병원으로, 폭탄 돌리기 하듯 미뤘다. 여러 군데 전화를 돌린 끝에, 웃돈을 주고 겨우 동생의 주검을 안치할 수 있었다. 빈소도 없이 차가운 냉동고에 몸을 뉘인 동생은 하루 뒤 영락공원에서 하얀 연기로 피어 올랐다.
사망신고를 하려면 조카들에게 연락해야 했다. 동생은 아이들이 어릴 때 이혼해, 연락을 끊고 산 지 오래였다. 동생이 도운 덕분일까. 몇 년 전 기초수급 신청을 할 때 연락처를 적어둔 수첩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연락이 닿은 동생의 딸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묻지 않았다. 때마침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김 씨는 모른 체 할 수 없어 축의금을 보냈다. 대신 전한 동생의 마음이었다.
■ 누나, 언제 와?
189cm에 100kg. 동생은 겉으론 건장해보였지만 속은 아팠다. 발단은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군인 생활을 견디지 못한 가족을 위해 동생은 대위 진급을 앞두고 전역을 택했다. 이후 서울의 한 백화점에 취직했지만 결국 아내와 갈라섰다. 동생은 몸만 나왔다고 했다.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게 해, 딸·아들과도 연이 끊겼다. 병원에선 이 일을 ‘조현병’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동생은 한동안 부모·형제와도 연락을 끊고 살았다. 경찰서에 수소문한 끝에 택시회사에서 일한다는 소식만 전해들었다. 2015년, 동생이 갑자기 부모님 댁을 찾아왔다.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옛집. 동생은 “그냥 들렀다”고 했다. 그해 11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동생이 이상해졌다. 항암치료 중이던 김 씨를 대신해 아버지 장례를 도맡은 동생. 그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일까.
이후 김 씨가 얻어준 원룸에서 동생은 사라지기 일쑤였다. 새 옷을 사주면 벗어버린 채 돌아왔다. 양말·장갑도 사라지고 없었다.
한번은 집나간 동생을 길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아줌마 저도 일하고 싶어요. 일할 데 없어요?”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동생은 일하고 싶어 했다.
상태는 갈수록 나빠져 병원 가는 길에 바지에 실례를 하기도 했다.
“그냥 정신을 못 차리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치매’가 온 거였어요.”
어머니에 이어 동생까지, 김 씨는 하루아침에 치매 환자 둘을 돌보는 신세가 됐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김 씨에겐 역부족이었다. 주치의는 “항암을 제대로 안 할 거면 병원에 오지마라”며 최후통첩을 했다. 결국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이 있는 강화도로, 동생은 근처 요양원으로 옮겼다.
동생은 유독 셋째 누나인 김 씨만 알아봤다. “엄마가 강화도에 계시는데 안 보고 싶니?” 물으면 한참 동안 눈만 깜박였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누나 왔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했다.
“선생님, 우리 누나가 아무래도 암에 걸려서 죽은 것 같아요. 나를 보러 안 와요.”
어느 날 동생이 울고불고하며 밥을 안 먹는다며 연락이 왔다. 항암치료와 정기검진을 받느라 발길이 뜸했던 시기였다.
그날 이후 김 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동생을 만나 안심을 시켰다. “누나 살아 있어. 염려 마.” 요양원 선생님은 동생이 다른 건 기억을 못해도 누나 말은 기억한다고 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다른 암 환자들은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왜 가족들까지 제가 다 돌봐야 하나 싶었죠. 그래도 제 몫인 걸 어떡해요.”
치매에 걸린 뒤부터 동생은 군대식으로 대답했다. 무조건 “네”밖에 몰랐다. 의견을 물으면 “음!”이 전부였다. 김 씨는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코로나로 투병할 때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던 동생이 하늘로 떠나고, 어느 날 꿈에 나타났다. “누나 고마워.” 동생은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김 씨에게 “나 머리가 너무 아팠어. 안 아프게 해줘서 고마워”라고 했다.
안정제와 수면제를 달고 살던 요양원에선 몰랐을 아픔. 코로나 치료 도중 간혹 정신이 돌아오면 병마와 싸우느라 많이 힘들었으리라. 김 씨는 약에 찌든 동생의 육신을 빨리 태워주길 잘했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김 씨에겐 아버지·어머니보다 동생의 죽음이 더 큰 슬픔이었다. 부모님은 아흔 넘게 사셨지만, 동생은 환갑도 채 넘기지 못했다.
“‘가슴이 애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고기 반찬을 좀 더 해줄 걸, 데리고 다닐 때 손이라도 더 잡아줄 걸,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김 씨는 기절을 하기도 했다. 충격으로 귓속 평형관이 고장나 어지럼증과 빈혈이 생겼고, 목(기도)도 상했다. 형제들은 어머니 상을 치르고, 동생까지 세상을 뜨자 다음은 김 씨 차례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남편도 자식도 없으니 혼자 어떻게 돼버리는 줄 알았대요. 정신을 차리고 영양제를 맞으면서 버텼어요. 뒤처리를 제가 해야 했으니까요.”
김 씨는 지금도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깜짝 놀란다. 중환자실에서 연락이 올 때 생긴 증상이다. 전화벨은 꼭 밤에 울렸다. 전화로 환자 상태와 치료 상황을 알려주는 대신, 병원에는 오지 못하게 했다.
간혹 멍하게 있을 때면,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누나를 알아보고 대화를 나누던 그 얼굴이 너무 생생해, 김 씨는 형제들의 타박에도 동생 사진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트라우마란 게 안 없어지더라고요. 트라우마 치료는 되도록 안 받으려고 애를 써요. 제 아픔을 그냥 제가 겪으면서 지내보려고요.”
김 씨는 가끔 동생이 지내던 요양원과 잠들어 있는 영락공원 납골당에 다녀온다.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간다. 남들 눈치를 안 보고 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녀오면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다. 삶의 의지도 생긴다.
“이제 서서히 저도 살아봐야죠. 제 나이 육십 몇이면, 앞으로 한 십 년은 잘 살아봐야 되지 않겠어요? 그동안 제 개인이 없었으니까요.”
김 씨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코로나19의 무서움을 지켜봤다. 주변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심하라’고 말할 정도로 코로나 예방 전도사가 됐다. 병원이나 휴게소에 갈 때면 꼭 일회용 장갑을 챙긴다.
“아직도 어르신들 중에는 ‘운이 없으니까 코로나에 걸린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6·25도 5·18도 재수 없고 운 없어서 겪은 게 아니잖아요? 코로나 확진자는 잘못이 없습니다. 스스로 조심해야 해요.”
김 씨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하나. 확진자와 유가족이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피력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김 씨는 코로나 사망자·유가족이란 낙인이 싫어, 동생의 사망원인 ‘폐렴’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뒀다. 정부지원금 1400만 원과 맞바꾼 셈이다. 덕분에 사망자 공식 집계엔 빠졌지만, ‘광주 891번 확진자’란 기록은 지울 수 없다.
동생의 마지막이 ‘숫자’로 기억되는 현실이 누이는 아프다.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