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태풍의 이름
이소정 소설가
학교에 갔다 온 아이가 마스크를 던지고 차가운 물을 마신다. 교실 컴퓨터가 고장 나서 수업을 못 했다고 종알거린다. 대신 학교 체육관에서 ‘태풍을 피하자’ 놀이를 했다고, 그건 술래가 두 팔을 벌려 빙글빙글 돌면서 아이들을 잡으러 다니는 게임이라고 했다. 술래에게 잡힌 아이는 작은 태풍이 된다고도 했다. 체육관을 뛰어다니는 작은 소용돌이들이 떠올랐다. 모두 잡히면 큰 태풍이 되는 걸까? 그러면 장마도 길어지는 걸까? 아이들 이름을 따서 태풍 여림, 태풍 지훈, 태풍 채은 그렇게 이름이 붙겠다 싶었다. 얼마 전 고니가 태풍 이름에서 퇴출 됐다는 기사를 읽어서였다.
장마도 시작되고 태풍도 오리라
피해 많이 준 태풍 이름은 퇴출
‘매미’ ‘고니’는 사라진 무서운 이름
다 같이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힘든 시기지만 사람 믿어야
다가올 태풍 ‘무사’ ‘평온’이라 붙여봐
우리나라를 관통하며 막대한 피해를 준 태풍 매미도 사라졌다. 나비는 독수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풍의 이름은 태풍의 영향권에 있는 14개국이 자국어로 된 이름을 태풍위원회에 10개씩 제출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전부 140개의 이름이 있고, 이 이름을 다시 28개로 5조로 나누어 순서대로 쓰고, 모두 호명되면 처음부터 다시 쓴다고 한다. 퇴출은 많은 피해를 주고 생명을 앗아간 이름을 지워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바람을 담는 것이다.
올해는 지각 장마라고 한다. 지난주부터 내린 비는 시작부터 부산 지역에 많은 바람을 몰고 왔다. 창문 밖으로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 세상이 온통 흔들리는 것 같다. 태풍이 무서운 이유는 진로나 세력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굵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아이들과 함께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창문에 엑스자 테이프 붙이기, 신문지에 물을 묻혀 붙이기 같은 대처법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우리 식의 태풍을 피하자, 인 것이다. 그리고 늘 이맘때쯤 떠오르는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더듬어 본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너구리, 수달, 노루, 개미, 장미는 우리나라 태풍의 이름이고 기러기, 소나무, 도라지, 버들, 봉선화는 북한의 태풍 이름이다. 일본은 여러 별자리 이름을 담았다고 한다. 아름답고 순한 자연과 우주가 가득한 이름. 그 태풍을 맞고 대추 한 알의 열매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닐까?
친정집 마당에 비 맞고 떨어졌다는 자두 몇 알을 아이와 함께 씻어 먹는다. 친정집에는 자두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그건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 때 친정아빠가 빌린 돈을 받으러 갔다 대신 받아온 묘목이었다. 그 이듬해부터 자두나무는 십오 년을 눈부시게 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동안 따먹은 자두는 이자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원금은 영영 깜깜이라는 친정엄마의 푸념이 해마다 열리는 나무다. 올해도 아이는 그 옛날 이자를 야금야금 먹고 있다. 시고 달고 시고 단.
그때는 왜 그렇게 돈을 빌려주고 못 받는 경우가 많았던 거야, 바보같이, 내가 묻자 아이에게 잘 익은 자두를 골라주는 손이 말한다. 다 같이 어려우니까. 누구 하나 똑같이 다 그런 시절이어서 다른 것보다 사람을 믿었다고 한다.
다 같이 어려운 시절이다. 배달라이더 카페에 올라온 글만 봐도 그렇다. 전업 기사님들, 태풍이 올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목숨 두 개 아니면 쉬는 게 답이죠.” “그래도 아이들 보험에 대출에 고정으로 나갈 돈도 있고…… 그냥 하는데요.” “나무 한두 그루 뽑히고 간판 한두 개 날아다니면 쉬고 장마 정도면 조심히 다녀요.”
비가 오고 날이 어두워지는 저녁, 다가올 태풍의 이름으로 무사나 평온 같은 단어들을 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