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오필리아의 선택
영화평론가
꽃 한 다발을 손에 쥐고 강물 위에 잠든 듯 누워있는 그녀. 연인이 아버지를 살해하자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강물에 던졌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한 장면을 묘사한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은 아름답지만 어딘지 슬퍼 보이는 여인, 오필리아가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녀는 주인공이 아니라 비련의 조연일 뿐이다. 오필리아는 햄릿과 신분차이를 극복하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단지 햄릿의 스쳐 지나가는 사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무 개의 장면으로 이뤄진 셰익스피어의 희곡 에서 고작 다섯 장면에 등장하는 오필리아는 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유일한 인물로 대중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캐릭터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햄릿의 관점으로만 서사를 바라보기에, 오필리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또한 오필리아의 비극적인 운명은 그녀를 단지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내어놓는 선택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녀의 마지막을 그린 그림, 오필리아를 볼 때마다 그녀의 심정이 궁금했다.
희곡 ‘햄릿’ 속 비련의 조연 오필리아
영화서 목소리 내는 주인공 재탄생
덴마크 왕비와 이야기 이끄는 핵심
‘사느냐 죽느냐…’ 명대사 등장 대신
주체적 인물로 고전 재해석 인상적
클레어 맥카시 감독의 ‘오필리아’는 그 대답이 되어줄 영화다. 영화 속 오필리아는 원작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평민 신분으로는 이례적으로 거트루드 왕비의 눈에 들어 시녀로 발탁된다. 여성이 도서관에 출입조차 할 수 없는 12세기 덴마크 왕실에서, 오필리아는 다른 시녀들과 달리 글을 읽을 줄 알며,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말하고, 햄릿의 구애에도 적절한 거리와 논쟁을 할 줄 아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왕궁에서 벌어지는 음모를 오필리아와 거트루드 왕비 두 여성을 중심에 두고 풀어나가고 있어 인상적이다. 왕궁에서 벌어지는 일은 남성들만의 문제이지만, 오필리아는 이 음모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햄릿과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광기와 죽음을 연기하며 위기를 빠져나가는 지혜로움과 현명함을 선보인다. 거트루드 또한 사랑에 나약한 한편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거트루드를 연기한 나오미 왓츠는 미지의 여인 메틸드까지 연기하며 1인 2역을 소화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영화의 엔딩은 인상적이다. 오필리아는 햄릿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왕궁으로 향하지만 햄릿은 사랑이 먼저가 아니었다. 햄릿이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즈와의 결투에 응하겠다고 말하자, 오필리아는 주저 않고 돌아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원작에서 오필리아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인물로 그려졌지만 영화에서는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주체적 인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하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가 먼저 떠오른다. 광분에 휩싸인 햄릿이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앞에서 고뇌했다면, 오필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연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고려하지 않는다. 햄릿의 삼촌이자 새로운 왕 클로디어스가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광기와 자신의 죽음마저도 연기하며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원작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앞세웠다면 오필리아는 죽음이나 복수를 전혀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영화에는 햄릿이 남긴 저 유명한 대사를 들을 수 없으며, 오필리아의 인생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 이처럼 ‘오필리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고전을 재해석하며 매력적인 오필리아를 만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