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가을 전어
달력 한 장을 넘기면 9월이다. 폭염과 습한 장마의 한여름이 한풀 꺾이고, 소슬한 가을바람으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질 듯하다. 이런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가 바로 ‘가을 전어’다. 개나리, 진달래 필 때 ‘도다리쑥국’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전어를 즐기지 못하면 올해 가을을 무사히 넘기지 못할 것 같은 강박증을 앓는다. 제철의 좋은 것들이 지닌 기운과 맛은 뭔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때를 놓치면 그 계절이 다시 한 바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여름 산란기를 마친 전어는 가을이 되면 살이 탱탱하게 붙고 기름기가 오르면서 뼈가 부드럽고, 고소하다. 그 고소함이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갔던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며느리의 귀환’을 부추길 정도다. 대가리를 살점 다지듯 쪼은 ‘대가리 다짐회’, 두세 토막으로 넙적넙적 썬 ‘전어 넙데기회’를 마늘과 땡초를 넣은 콩된장에 듬뿍 찍은 뒤 전어 젓갈에 담근 묵은지로 쌈을 싸서 한입 가~득 먹으면 뭉클 나는 비린내와 함께 탱실탱실한 맛이 넘쳐난다. 부산 경남 갯가 사람은 전어회 한 점에 소주 한 잔 곁들이면 ‘한 세상 잘~살고 있네’라며 힘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전어는 조상들이 즐겨 먹었던 대표적 생선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전어를 으뜸으로 쳤다. 1827년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귀한 돈이 아깝지 않은 물고기’라며 전어(錢魚)라고 썼다. 9월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면 부산 시내 횟집 수족관에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은백색 전어가 우르르 헤엄치며 춤사위를 뽐낸다. ‘가을이 되었으니 꼭 맛보시라’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이때쯤이면 명지와 가덕도, 다대포 등 낙동강 앞바다에는 전어가 펄쩍펄쩍 뛰며 떼를 이룬다.
명지는 1970년대 후반부터 성질이 급한 전어를 활어회로 최초로 선보인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9월 초 명지에서는 ‘전어 축제’가 열렸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지난해에 이어 2년째 축제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마스크를 쓴 채 불볕더위와 태풍, 긴 장마로 잃었던 입맛을 전어로 되찾는 가을이 두 번째로 찾아오니 참 세월이 빠르다.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코로나가 사라질 내년 ‘명지 전어축제’에는 좋은 친구들과 풍성한 전어회를 맛보며 웃고 떠들면서 힘겹게 살아온 지난 시간을 곱씹어 보련다. 세월이 깊어 갈수록 전어 맛도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