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인의 한우 사랑, 이제는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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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일 역사작가

지난 3월 미국의 USA투데이는 ‘왜 한국 한우 쇠고기는 지구상 최고의 고기가 될 수 있나’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매체는 한우를 ‘10대 여행 최고 관심사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2000년 이상 우리나라 땅에서 자랐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주로 쌀농사 경작에 사용되었던 한우가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급 요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우 요리와 관련된 역사는 어떨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고기 요리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때 ‘맥적(貊炙)’이다. 고기에 장과 마늘로 양념을 해서 구워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사람은 가축을 도축하는데 서투르고 고기로 구이나 국을 만들면 고약한 냄새를 잡지 못한다’고 에까지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에는 고기 요리가 일상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고려에 뜻밖의 상황이 닥쳤다. 몽골의 침입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음식 중 채식의 비중이 가장 적은 식단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몽골이다. 그 영향을 100여 년 가까이 받은 고려의 식단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기를 재료로 삼은 국과 탕이 등장한 것이다. 설렁탕, 곰탕, 국밥이 이 때 등장했다. 맑은 물에 고기나 뼈를 끓여내는 것을 공탕(空湯)이라고 하며, 고기나 뼈를 끓여 소금과 파, 국수를 넣어 먹는 국을 ‘슐렝’이라고 했으니 지금 곰탕이며, 설렁탕의 시작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몽골의 고기 요리는 양고기였지만 고려에서는 이것이 한우로 바뀌었다.

조선이 건국하며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영향은 사라졌지만 대신 소를 잡는 것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다. 소가 다리를 다치거나, 병이 들었다는 등의 이유로 관의 허락을 받아 수송아지를 잡을 수 있던 정도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우를 거의 먹지 못했을까. 적어도 양반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의 주인공 이문건은 2달에 세 번 정도 한우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제사가 일상이었던 조선에서는 제사를 지낸다면 한우를 먹을 수 있었다. 옛날 성균관 옆 반촌(泮村)이 한우로 유명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또 풍년이 들면 새해 며칠 동안 도살을 허락해 주었다. 자연스럽게 궁궐이나 양반가에는 한우 요리법은 전승되었다.

그러나 일반 평민에게는 탕과 국 요리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한우는 멀기만 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바뀐 것은 19세기 말, 소를 수출품으로 인식하며 일소와 식용 소로 구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오며 ‘불고기’가 등장했다. 고기 소비가 늘어가며 축산 환경이 바뀌고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함께 이제 외국에서도 불고기판에 구워지는 불고기를 접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게 됐다.

한우는 이렇게 시대마다 민족의 역사와 사연과 함께 매번 다른 모습으로 우리 민족과 세계인들에게 다가갔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음식 소비 트렌드가 변하며 유통, 판매 등에서 한우산업 역시 변화와 함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한민국이 한우 먹는 날’(11월 1일)에도 온라인 한우장터를 준비하는 등 위드코로나 시대에 발맞추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오랜 시간 우리 민족과 함께 시대의 위기와 변화를 함께 했던 한우의 미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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