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북구’라는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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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있고 강 있고 기후까지 온화하다. 이런 곳에 사람이 몰리지 않을 리 없다. 부산 북구가 그렇다. 금곡동 율리 조개무지에서 신석기, 화명동 수정마을 뒷산에선 청동기, 덕천동 고분군에선 철기의 문화가 잇따라 확인됐다. 아득한 옛날부터 북구는 사람 살기에 좋았다.

사람 살기 좋은 곳이 변방일 리 없다. 지금 북구엔 만덕사라는 고려 시대 사찰의 흔적이 있다. 그 터와 당간지주로 미루어 당대 최대 사찰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 만덕사 관련 이야기가 전한다. 충렬왕의 서자인 석기 왕자가 출가했는데, 출가한 절이 만덕사이고, 만덕사에 석기 왕자의 머리카락을 보관했다는 내용이다. 한 나라의 왕자가 출가처로 삼을 정도로 만덕사의 위상이 높았고, 그런 만덕사를 품은 북구 지역이 변방으로 치부됐을 리 없다는 이야기다.

조선 시대에도 북구 지역은 도회지지(都會之地)로 불렸다. 구포에 조세 운송 기지인 남창(南倉)과 일본과 서울을 잇는 수로 교통의 중개지 역할을 하는 수참(水站)이 함께 설치됐을 정도였다. 물자 집산지이자 교역 중심지였던 덕에 북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설립된 구포은행이 그것으로, 민족자본으로 설립돼 당시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일제 금융에 저항했다.

그런 북구가 ‘북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63년 구포읍이 부산진구로 편입되면서 부산진구 구포출장소가 설치됐다. 1975년 구포출장소는 부산시 직할 출장소로 위상이 바뀌면서 북부출장소로 불렸다. 부산의 중심인 부산진구의 북쪽에 있다 해서 그리 된 것이다. 이 북부출장소라는 이름이 1978년 구포읍이 구(區)로 확대·개편되면서 그대로 따라붙어 ‘북구’라는 행정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현 북구청장이 북구 명칭 변경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찬반 논란이 분분하다. 찬성 쪽은 ‘북구’가 지역의 특징이나 역사, 문화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변방의 느낌이 다분한 방위 개념일 뿐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반대쪽은 “실익은 없고 혈세만 낭비하는 걸 왜 하냐”고 따진다.

서로 접점 찾기가 쉽지 않다는데, 논란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 공방으로까지 이어지는 모양새다. 과거 인천 남구는 지역 특성에 바탕을 둔 ‘미추홀구’로 이름이 바뀌어 통용되고 있는데, 부산 북구는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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