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와 하나된 악양루서 흘러간 유행가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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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처녀뱃사공노을길

소리도 없이 소문도 없이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간다. 며칠 전만 해도 라디오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을 외치는 노래가 들리더니 어느 새 달력은 11월 중순을 향하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꽃과 만추의 풍경을 구경하러 경남 함안에 다녀왔다.

악양생태공원~악양루~악양둑방길 코스
핑크뮬리와 남강·모래톱의 오묘한 조화
피난길 사연 ‘처녀뱃사공’ 노래비에 눈길
큰 바위와 한 몸 같은 악양루 ‘천하절경’
둑방길선 황량한 아름다움 느끼며 산책



■악양생태공원

여행 경로는 처녀뱃사공노을길이다. 악양생태공원에서 출발해 악양루를 거쳐 악양둑방길을 돌아보는 코스다. 남강은 물론 함안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코스로 이뤄져 있다.

악양생태공원을 에워싸고 있는 강둑 곳곳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시원한 풍광이 일품인 남강을 내려다봄은 물론 남강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이라도 건져가라는 뜻에서 세워놓은 시설물이다. 소나무 여러 그루가 강을 향해 허리를 길게 구부리고 있다. 강 건너편 평원의 경치가 정말 아름다워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구경하려고 그러는 모양이다.

악양생태공원 안에는 연한 갈색과 핑크색 꽃이 피어 있다. 어떻게 보면 가느다란 갈대 같기도 하다. 요즘 가을이 되면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핑크뮬리다. 연인이나 오랜 친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꽃 단지 안에 들어가 휴대폰을 찰칵거리며 가을바람만큼이나 시원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펴본다. 둑을 따라 오른쪽으로는 푸른 남강과 노란 모래톱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정반대 색인 핑크뮬리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주 낯선 색의 조합이지만 뜻밖에도 상당히 이색적인 조화의 멋을 이루고 있다.

핑크뮬리 꽃 단지 끝부분에는 노를 든 소녀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중 하나인 ‘처녀뱃사공’ 노래비다. 조각상 앞에 서서 속으로 조용히 노래를 불러본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처녀뱃사공’은 한국전쟁 때 부산에 피난을 왔던 작곡가 윤부길 씨가 악단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만난 처녀 뱃사공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남강이 흐르는 법수면과 대산면을 잇는 악양나루터에서 노를 젓던 처녀 뱃사공이었다. 그녀는 군에 간 뒤 소식이 끊긴 오빠를 대신해 노를 저었다. 윤 씨가 그 사연을 가사에 담고 곡을 붙여 1959년에 노래가 탄생했다. 그녀가 살던 곳은 오늘날 악양루가든으로 바뀌었다. 이 식당 주인은 노래 주인공인 처녀 뱃사공의 조카다. 악양루가든 입구 쪽에도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악양루

‘처녀 뱃사공’ 노래비를 지나면 ‘악양루 데크로드’가 나온다. 함안의 유명한 정자인 악양루로 이어지는 산허리길이다. 악양루는 1857년에 세워졌다가 한국전쟁 때 소실됐지만 1963년 복원됐다. 악양이라는 이름은 이 일대의 경치가 중국의 동정호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악양루 외에도 함안에는 누각이나 정자가 상당히 많다. 악양루처럼 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를 잡은 정자가 있는가하면 평지에 눌러앉은 곳도 있다. 함안에 정자가 많이 세워진 것은 산세가 험한데다 남강과 낙동강이 흐르는 덕분에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함안에는 ‘울고 왔다 울고 가는 함안 원님’이라는 옛말이 전해 내려온다. 이곳에 부임한 사또가 처음에는 낙심해 울고, 나중에는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임기가 끝났을 때 떠나기 싫어 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악양루로 가는 산허리길은 제법 험하다. 하지만 그렇게 먼 길이 아니어서 5분 정도만 걸으면 되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다. 왼쪽으로는 험한 바위가, 오른쪽으로는 남강이 발걸음을 함께한다. 고불고불한 산허리길에서 바라보는 남강 경치는 제법 눈을 시원하게 한다.

악양루는 산에 깊숙하게 박힌 거대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악양루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편에는 악양둑방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봄에는 꽃양귀비 등 다양한 꽃이 피어 일대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초가을에는 국화와 코스모스가 피어 행락객을 유혹한다.

사실 악양루 경치의 최고봉은 노을이다. 강으로 해가 떨어지며 노을이 물드는 악양루의 석양은 반구정의 일출과 함께 함안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노을을 보자고 여기서 해가 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악양둑방길

악양루로 올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오면 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부교가 설치돼 있다. 부교를 건너면서 또는 건너가서 바라보는 악양루와 그 일대의 풍경은 악양루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와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악양루는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마치 자연이 처음에 생겨날 때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주변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검은 기와와 갈색 난간은 수천만 년은 됐을 바위와 한 몸을 이뤄 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강을 건너면 악양둑방길과 둔치가 나타난다. 봄에는 꽃양귀비 등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스모스 등이 활짝 피어있었던 둔치는 내년 새 봄맞이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모든 꽃과 풀을 갈아엎은 그 모습에서 특이하게도 황량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원초의 자연이 원래 이 모습이었을까?

둔치에 남은 생명이라고는 꽃과 풀이 햇빛을 피해 쉴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 다섯 그루가 고작이다. 강변에 난잡하게 피어 있는 갈대는 둔치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다.

둔치와 강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걷는다. 가을바람에 먼지가 솔솔 인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게 이렇게 신비하고 이색적일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는 말도, 생각도, 감정도, 느낌도 필요 없다. 다만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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