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건희 기증관’ 서울 확정, 지방 문화소멸 가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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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기증관’이 결국 서울에 설립되는 걸로 결론 났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일대 대한항공 부지를 이건희 기증관 건립 부지로 활용키로 9일 의결한 것이다. 문체부는 다음 날 서울시와 그에 관한 업무협약까지 속전속결로 체결했다. 이건희 기증관은 고(故)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2만 3000여 점의 문화재와 미술품을 보관·전시하는 시설이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오는 2027년 개관한다. 분명 반가운 소식이어야 할 텐데 서울 이외의 곳에 사는 사람들의 허탈감은 한층 커졌다. 문체부의 이번 결정이 ‘문화 균형발전’을 요구한 지방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균형발전” 지방 요구 철저히 외면
정부 ‘서울 중심주의’ 미련 못 버려

문체부가 송현동 낙점의 명분으로 내세운 건 역사·문화 자원 등 입지 조건이다. 주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문화시설이 밀집해 있어 ‘이건희 기증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서울에는 그런 역사·문화 자원이 이미 충분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나치면 오히려 모자라는 법인데, 거기에 굳이 이건희 기증관 하나를 더해야 할 긴박한 이유가 무엇인가. ‘깊이 있는 연구’는 지방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인가. 정부가 당초 제시한 이건희 기증품 활용의 기본 원칙은 ‘국민 문화향유 기회 확대’였다. 기증관이 꼭 서울에 있어야 그 원칙에 부합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체부는 올 7월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를 물색하면서 별다른 공모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해 논란을 빚었다. 부산을 비롯한 각 지자체들이 이건희 기증관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때라 반발이 거셌다. 정부의 서울 중심주의에 대한 지방 문화예술계의 성토도 이어졌다. 지역에 대한 무시이자 최소한의 공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독선적 결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문체부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를 결정하는 ‘소장품 활용위원회’에는 지방의 의견을 대변할 인물은 포함되지 않았고, 그 흔한 공론화 과정조차 없었다. 결국 이건희 기증관은 서울에 세워지게 됐다. 철저한 지방 소외의 결과다.

인구와 재화가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그로 인해 지방소멸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판에 문화마저 서울이 독식하는 현실은 그대로 국가적 재앙이다. 지방의 비난 여론을 의식한 황희 문체부 장관은 이건희 기증품의 지방 순회 전시를 정례적으로 개최하고 권역별 문화시설 거점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런 애매한 약속으로 무시당한 지방의 자존심을 달랠 수는 없을 테다. 이번 이건희 기증관 부지 결정으로 정부가 그동안 입으로는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서울 중심주의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지방으로선 실망을 넘어 분노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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