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세계는 지금 ‘군비 경쟁’ 도미노
승자 없는 치킨게임 ‘허망한 안보경쟁’ 페달 멈춰야
“어떤 경주든 결승선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군비 경쟁은 결승선이 없는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기에서 이기는 방법은 더 빨리 뛰는 게 아니라, 러닝머신에서 가능한 한 빨리 내려오는 겁니다. ”(제프리 루이스 미국 미들베리대 국제학연구소 교수)
미·중 전략 경쟁이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아시아·태평양에서 냉전 시대 군비 경쟁 공포가 덮치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과 대만해협의 갈등 고조는 한국과 일본 내부에서 핵잠수함 도입 필요성까지 거론될 정도로 군비 경쟁 도미노 게임을 초래하고 있다. 중국 위협에 대응해 호주는 미국·영국과 핵 잠수함 안보 동맹을 맺으면서 태평양 안보 축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일본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변신을 추진하고 있다.
G2부터 북한·대만해협까지
전략 경쟁 전방위로 확대
인접국 군사력 증강할수록
끝없는 안보 딜레마 덫에 빠져
자주국방 차원 경쟁 뛰어들어
호주, 핵잠 8기 도입 계획
한국, 재래식 전력 고도화
일본, 적 기지 공격능력 추진
핵 개발 경쟁 갈수록 심화
결승선 없는 러닝머신 뛰는 것
하루빨리 끝낼 방법 찾아야
북한, 다양한 핵 투발 수단 개발
북한은 기본형 핵폭탄을 완성하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다양한 투발 수단을 고도화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10월 함경남도 신포 인근 해상에서 SLBM을 발사했다. 해군 초대 잠수함 전단장을 지낸 김혁수 예비역 제독은 “아무리 조악한 잠수함이라도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발견하기가 어렵다”며 “그런 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을 쏜다면 그 자체가 재앙”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SLBM은 전략적 균형을 깰 수 있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불린다. 영국과 프랑스는 핵 억지전략 차원에서 모든 핵무기를 SLBM으로 운용하고 있다.
만약, SLBM을 탑재한 북한 잠수함이 해류를 타고 경북 성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후방 지역인 포항 남쪽 해상으로 잠항하거나, 더 나아가 서태평양 쪽으로 이동한다면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괌 미군기지, 미국 본토까지도 겨냥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북한이 유사시 한반도 수백㎞ 상공의 고고도에서 핵무기를 폭발시킬 경우 미국 본토까지 핵전자기펄스(HEMP) 공격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국 미사일 사정거리 확대 등 맞대응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누구도 흔들지 못하게 하는 힘,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포괄적인 안보역량을 키우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비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2020년 전 세계 군사비 지출 10위를 기록했고, ‘2022~2026 국방중기계획’을 통해 향후 5년 동안 총 315조 원을 국방비로 투입할 계획이다. 한국은 북핵·미사일을 타격하기 위한 킬체인(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북한 전쟁지휘부 대량응징보복(KMPR) 등 3축 체계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군 정찰위성, 고고도 정보탐색능력, 스텔스 항공전력, 원해 작전수행전력, 초음속 순항미사일 도입과 함께 전술핵급 파괴력을 가진 ‘고위력 탄도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은 최근 3000t급 잠수함인 도산 안창호함에서 SLBM 수중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북한의 SLBM 잠수함 투입에 대응해 내년 차기 정부에서는 핵추진잠수함 도입이 공론화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이 북측의 핵·미사일 전력을 ‘선제적’으로 파괴하는 군사전략을 강조하면서, 위기 시 오히려 북한이 조기에 핵 사용을 결심할 위험성도 간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동아시아 연쇄적 군비 경쟁 심화
호주는 미국, 영국의 기술 지원으로 최소 8척의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할 계획이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 군사적 경쟁에서 남중국해를 포함한 인도-태평양 해양 거점인 호주 국방력을 강화시키려는 전략적 움직임이다. 호주의 핵잠수함 도입 결정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누적되어 온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우려에 기반하고 있다. 호주 정부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방 예산 증액을 추진 중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내년도 ‘국가안보전략(NSS)’에 적국의 군사 거점을 폭격기나 장거리 미사일 등으로 선제공격해 파괴할 수 있는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정책을 명시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기시다 정권은 이를 위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방위비 비중을 2배로 늘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미 12척의 핵잠수함을 보유한 중국도 2030년까지 21척으로 늘릴 전망이다. 내년 초 세 번째 항모를 완공하는 중국은 8월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등 미군 미사일 방어망을 무력화할 수 있는 차세대 전략무기 개발에 혈안이다. 대만해협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는 미·중 양국이 더 치열한 군비경쟁을 벌이게 되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경쟁적인 핵무기 증강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군비 경쟁의 안보 딜레마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와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을 가지기 때문에 ‘절대무기’라고 불린다. 핵이 없는 한국은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확장억지전략’에 기대어 왔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의 SLBM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으로 본토가 위협 받는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을 지원할 것인가이다. 탄도미사일 등 한국의 우월한 재래식 전력이 미국 핵우산이 없더라도 북핵 위협을 감소시킬 수 있느냐는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에서는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원자력 발전 연료 도입 중단, 중국의 강한 반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핵잠수함 도입과 자체 핵무장이나 전략핵 배치 등 논쟁이 불거질 전망이다.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사태를 보면서 안보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힘은 국가 스스로에 있다는 사실을 세계가 절감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쇠퇴에 따른 힘의 공백을 국가별로 전력을 증강해 메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북한의 핵 위협, 한국과 일본의 재래식 전력 강화, 호주의 핵잠수함 확보 등은 스스로의 안보를 위한 군사력 증강이지만, 결국 상대방의 군사력 증강이라는 반작용을 야기하고, 이런 과정이 악순환하며 자국의 안보에 위협으로 돌아오는 ‘안보 딜레마’가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 개발에 집중하면서 한국은 킬체인 등 재래식 첨단전력 확대로 맞서고 있다. 결국 진보·평화주의를 내세운 문재인 정권에서마저 끝없는 안보 딜레마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물론, 한국은 북핵 문제 혹은 이와 무관한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의 국방력 강화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군비를 확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F-35 스텔스 전투기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일본, 중국, 러시아의 공군력에 포위돼 영공 방어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주변국의 군사력 증강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은 자주국방을 위해서라도 군비 경쟁에 대응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다.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