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호국도량
경남 양산 통도사(불보사찰)는 해인사(법보사찰), 송광사(승보사찰)와 더불어 ‘삼보사찰’로 불린다. 불보사찰은 창건주인 신라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 온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그중에서도 통도사의 정체성과 떼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금강계단이다.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안치하면서 그 계단을 쌓았기 때문이다. ‘통도(通度)’라는 말도 금강계단을 통해 도를 깨닫고 진리를 얻었다는 내력을 품고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이 금강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 나온다.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으로 계단이 일대 수난을 겪는 바, 당시 주지 월송 스님이 진신사리와 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로 갔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도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사리를 둘로 나눠 금강산의 서산대사에게 보내자 서산대사가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 하나는 다시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시라 했다는 내용이 금강계단 옆 비석에 전해 온다. 가람의 대부분이 전소되고 약탈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국난 극복의 구심점이 되었던 곳이 통도사라는 얘기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동부 경남에서 처음으로 궐기한 ‘3·13 신평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도 통도사 스님들이었다.
근자에는 통도사가 한국전쟁 당시 육군병원 분소로서 야전병원의 역할을 담당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3000여 명의 부상병가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사찰 시설물을 점검하던 중 발견된 때가 2년 전이다. 기록을 보면, 통도사의 모든 법당과 암자가 수술실과 치료실로 쓰였던 듯하다. 이듬해에는 통도사에 치료 차 머문 장병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낙서가 대거 나오기도 했다. 육군병원 분원이 대전에 있다가 1951년 1·4 후퇴 직후인 1월 6일 부산 동래로 이전했는데 병실이 모자라 통도사를 육군병원 분소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확인됐다.
최근 통도사가 국내 사찰로는 처음으로 국가 현충 시설에 지정된 것은, 대표적 호국도량으로서의 역사적 소임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겠다. 물론 통도사뿐만 아니라 여러 사찰들이 국난의 위기에 사적인 수행 도량의 한계를 넘어 공공의 역할을 다해 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부산 범어사 역시 한국전쟁 당시 야전병원이었고 전사자들의 유골을 임시 봉안한 안식처였다. 1955년 서울에 국립묘지가 설립될 때까지 범어사는 숨진 영령들을 추모하는 국립현충원의 기능을 담당했다. 인간사의 궁극적 지향을 모색하는 종교의 모습이 새삼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즈음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