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여성의 역사로 다시 쓰는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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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민족과 여성 역사관 김문숙 이사장의 부음을 들었다. 영화 ‘허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들과 더불어 일본 사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책임을 일부 인정한 ‘관부재판’을 이끈 인물이다. 2004년 사재 1억 원을 들여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설립하였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관부재판 기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추모 기간에 그곳을 다시 방문하면서 빼곡하게 들어선 기록과 사료들을 살펴보았다. 폭력과 착취의 아픈 역사는 세상에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피해자에게 낙인이 가해지고 망각과 침묵이 강요된다. 그러한 질곡으로 점철된 여성의 기억과 기록이 공식적인 역사가 되어 가는 과정을, 우리는 ‘위안부’ 운동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피해 당사자의 용기 있는 증언이 있었고, 이 목소리를 들으려는 연구자와 수많은 운동가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공식적인 여성 인권의 역사로서 ‘위안부’ 문제를 우리는 전 세계에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문숙 이사장 부음 계기 돌아본
발굴되지 않은 부산 여성의 역사
성인지적 관점 조망·연구 드물어

최근 여성 서사 아카이빙 움직임
완월 아카이브 웹 페이지도 오픈
여성의 역사 기록 지원 뒷받침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우리의 아픈 역사만이 아니라 아직도 충분히 발굴되지 않은 부산 여성의 역사는 너무나도 많다. 안타까운 일은 이를 기념하고 기록하는 장소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부산 시민들은 부산과 경남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부산, 경남에서 최초로 3·1 만세운동을 벌인 일신여학교 학생과 교사들의 이야기조차도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창원시에서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과 한국 여성학의 대모 이이효재 선생의 거리를 조성하는 등 여성의 역사를 조망하고 그 의미를 도시에 새기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영도의 도시재생사업 이름인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는 ‘깡깡이 아지매’라고 불리던 조선소의 여성 노동자들 활동에서 따온 말이다. 영도에 깡깡이 아지매가 있듯이 중구에는 자갈치 아지매가 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 이후 여성 상인과 노동자들의 활약은 그 자체가 부산의 생동감을 고스란히 안고 있지만, 자갈치 아지매나 깡깡이 아지매의 삶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조망하거나 연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제주의 해녀박물관과 같은 기념 공간이 부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국내 신발산업의 80%를 차지한 부산의 신발공장의 대다수 노동자는 여성이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기억과 증언은 노동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부산여성단체연합의 대표를 지내던 2019년, 부산의 신발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의 강연을 기획하고 신발공장의 옛터를 따라 함께 걷는 프로그램을 기획한 적이 있다. 당시 진양고무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현 진양사거리의 황금신발상 앞을 함께 걸었는데, 표지석 어디에도 신발공장 여성 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부산여성단체연합에서 당시 부산진구청장에게 제안을 하고 부산진구의 여성단체협의회가 후원을 해서 마침내 부산 여성 노동자들을 기리는 표지석을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부산이라는 도시를 여성의 서사로 다시 들여다볼 때 우리는 과거를 더욱 새롭게 발견하고, 미래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갈 수 있다. 타 시도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여성의 역사를 발굴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지역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역사, 충분히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대한 지역 아카이브는 더욱더 많은 시민 참여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도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 된다.

다행히 여성의 서사를 아카이빙하여 새로운 역사로 만들어 가는 움직임이 최근 부산에서도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부산의 영상미디어 단체인 미디토리협동조합에서는 ‘기록하는 마음들’이라는 주제로 2021년 비영리미디어 컨퍼런스를 열었다. 프로그램 중에는 지역, 여성, 아카이브라는 세 가지 공통된 키워드로 작가들을 초청해 성인지적 관점으로 바라본 도시의 역사는 어떻게 다르게 기록되어질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 있었다. 부산문화예술계 미투운동을 아카이브하고 기록했던 송진희 작가와 성착취 집결지 완월동을 여성 인권의 역사로 새롭게 기록하고 있는 완월 기록연구소의 정경숙 작가 등이 아프고도 소중한 부산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산문화예술계 미투운동 아카이브는 2020년에 만들어졌고, 올해는 완월 아카이브 웹 페이지가 문을 연다. 아픈 기억을 외면하지 않고, 개인의 싸움으로만 끝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공공의 역사로 부산의 기억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듯하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과 같은 장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아카이브 작업의 귀함을 다시 생각한다. 부산의 공간을 여성의 역사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에 보다 많은 관심과 충분한 지원이 뒷받침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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