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사망] 굴곡진 현대사의 장본인… 과오 사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광주 5·18 유혈진압이라는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남긴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반성도, 사죄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대한민국이 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1980년대에 7년 동안 권좌를 누렸지만, 그의 집권과 재임 시절은 최악의 민간인 학살, 강압적인 철권 통치 등 독재의 그림자가 훨씬 짙다. 가는 길마저 역사적 과오에 그 어떤 진정성 있는 조치도 없었다는 점에서 역대 대통령 중 ‘최악’이라는 평가는 후대에도 크게 달라질 여지가 없어 보인다.
육사 입학 후 엘리트 군인 코스
12·12쿠데타 주도해 권력 장악
군 1인자 거쳐 7년간 대통령 권좌
5·18 민간인 학살·삼청교육대 등
군사 정권 위해 국가 폭력 자행
퇴임 후 내란죄로 투옥됐다 사면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태어난 전 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사(11기)에 들어가면서 엘리트 군인 코스를 밟았다. 육사 시절 보스 기질이 강했던 그는 영남 출신 육사 동기와 후배를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결성을 주도하는 등 권력욕이 남달랐다.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오른 그는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피살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고, 한 달여 뒤인 12월 12일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내란 방조 혐의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는 등 군사 반란을 일으키면서 일거에 권력을 장악했다. 특히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에 반발한 광주 시민들이 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며 거리로 나오자 공수부대를 투입,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은 현대사 최대의 비극을 일으켰다. 그해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뒤 그해 유신헌법에서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 씨는 5공 헌법을 만들고, 그 이듬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재취임했다.
전 씨는 집권 기간 학원자율화나 통행금지 폐지 같은 유화책을 내세우며 합법성과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려 했고, 특히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라는 이른바 ‘3저 호황’으로 경제가 급성장하는 운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5공 군사 정권은 삼청교육대, 언론사 통폐합 등 철권 통치를 이어갔고, 수많은 야당 인사와 학생들에게 친북 용공 혐의를 씌워 모진 고문을 했다. ‘정의사회 구현’을 외쳤지만, 기업인들을 겁박해 통치자금을 조성하는 등 부정축재를 일삼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시 재계 7위였던 부산의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된 일이다. 정부가 부실기업 낙인을 찍어 그룹을 전면 해체했지만, 내막은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정권에 밉보였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당시에도 파다했다. 부산의 주요 수출기업이던 동명목재 역시 정권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헌납됐다.
반면 전 씨 측은 재임 중 물가안정 등 경제성장 기조를 유지했고, 88하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국제적 위상을 높였으며, 7년 단임 약속을 지킨 점을 업적으로 내세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5공 정권도 말기에는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꺾지 못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을 계기로 타오른 민주화 열기는 ‘6월 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을 불렀고, 결국 직선제 개헌을 떠밀리듯이 수용한 전 씨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 들끓는 단죄 여론 속에 전 씨는 재산 헌납을 발표한 뒤 2년 동안 백담사에서 은거했다. 그러나 1993년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역사 바로세우기’를 추진하며 전 씨에 대한 사법적 단죄에 나섰고, 결국 5·18과 12·12, 수천억 원의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지만 수감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그럼에도 전 씨는 생전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유혈 진압의 책임 등에 대해서는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는 2019년 회고록에서 자신의 기존 입장을 강변하며, 광주의 진실을 왜곡한 혐의로 최근 다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