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또 하나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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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 소설가

습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병이 있고 그들만 살아내야 하는 계절이 있다. 봄, 여름, 가을 다음에 오는 신춘, 그리고 겨울이다. 그들은 이렇게 다섯 계절을 살고 불치병이라는 신춘병을 앓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래 그 병을 앓았고 그 계절을 살았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그렇다. 10월 말이 되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이룰 수 없는 꿈이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나를 울리는지 우리는 안다.

신춘문예는 세상에 태어나 내가 가장 많이 본 시험이고 가장 많이 떨어진 시험이다. 마치 수능을 열 번 정도 본 느낌, 아니 그것도 부족하다. 대학에 다닐 때는 멋모르고 당선 소감부터 썼다. 그때는 누구누구에게 감사한다는 말도 안 썼다. 내가 잘나서 될 줄 알았고 그래서 감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언제나 맑은 물이 든 그릇처럼 글을 쓰겠다, 그 위로 고요한 바람이 지나다니게 하겠다, 그 비슷한 말을 썼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그릇이란 말인가. 맑은 물은 문장인가, 주제인가. 지금의 나는 이십 대 초반의 장식적인 허세를 달고 살던 나를 모른다. 그래서 안 된 것 같다. 그래도 산뜻하게 '묻고 더블로 가!'를 외칠 수 있었던 건 그때의 내가 신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너무 몰랐기 때문에, 바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나 나는 다시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위해 소읍의 김장철에 우체국을 찾는 사람이 됐다. 병이 재발했다. 프린트한 원고를 세상 가장 소중한 것인 양 가슴에 품고 안될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외로운지에 대한 혹독하게 배웠다. 그러는 동안 안면이 있는 직원이 생겼고 그들 앞에서 작아진 나는 절인 배추보다 더 초라해졌다.

그러나 신춘이라는 계절의 강추위는 그때가 아니다. 해마다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는 1월 1일이지만 당선자에게 연락이 오는 것은 늦어도 크리스마스이브 전이다. 나는 그때까지 되지도 않을 원고를 보내놓고 세상에서 오는 모든 전화를 받았다. 가끔 지역이 찍힌 번호나 모르는 핸드폰 번호가 오면 심장이 먼저 달려 나갔다. 전화를 끊고 나면 나는 세상의 끝에 서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오고 너무도 단란한 세상의 가족들은 내가 망한 줄도 모르고 케이크의 촛불을 끈다. 상실감과 패배감이 다음 해 삼월까지 이어진다.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그렇다.

신춘이 되고 나서 가끔 나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춘문예 원고는 원고지에 적어서 내야 하는가? 몇 포인트가 좋은가? 당선자가 이미 내정되어 있다던데? 예심은 다 읽지 않고 첫 장과 마지막 장만 읽는다던데? 지역 신문은 지역 습작생에게 유리한가? 등이다. 대부분 나도 한 번쯤 들어봤고 해봤던 질문들이다.

신춘문예 원고는 표지를 따로 만들어서 A4지에 일반 문서처럼 프린트해서 내면 된다. 당선자는 절대 내정돼 있지 않다. 그건 내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심과 지역 신문에 대한 것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복잡하고 성가신 일을 왜 할까, 등단 제도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신춘문예라는 말을 들으면 순수하게 설렌다. 이 년 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중에 마지막 날 아이의 손을 잡고 마감 직전에 원고를 내신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나가면서 당선되면 다시 와서 인사하겠다고 말하고 갔다가 실제로 당선이 되셨다. 정신없이 원고를 출력하고 아이를 픽업하고 막히는 퇴근 시간의 정체를 뚫고 마침내 도착할 수 있는 곳. 글을 쓰고 내 글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에 대한 순순한 열망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같다. 아마 스무 살의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도 여전히 바보라 가능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신춘의 계절이 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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