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아직 오지 않은 자치분권의 제7공화국
논설실장
제5공화국·6공화국의 주역이 역사 무대에서 잇따라 퇴장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이 타계한 지 28일 만인 11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육사 11기 동기생으로 1979년 ‘12·12군사반란’을 주동해 대통령직에 차례로 오른 두 사람의 동시 퇴장이 묘한 울림을 준다. 그들은 갔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가 유산처럼 남긴 ‘87년 체제’가 이 땅에서는 여전히 굳건하고 완강하다.
5공에서 6공으로 가는 길목에는 3개의 뚜렷한 정치 이정표가 있다. 전두환의 5공 압제에 저항한 1987년 6월 항쟁, 이에 굴복한 당시 여당 대선후보 노태우의 ‘6·29선언’, 그 뒤를 이은 10월 29일 제9차 개헌안 제정 공표가 그것이다. 87년 체제는 그렇게 막 올랐고,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취임으로 제6공화국의 문을 연 이래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 시대 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년 3월 9일에는 그 공화국의 8번째 대통령이 탄생한다.
노태우·전두환 한 달 새 잇따라 타계
5공 이은 6공 ‘87년 체제’는 여전
정치 사회 곳곳 ‘중앙집권’ 득세
수도권 일극주의·지방소멸 가속
언제까지 87년 체제 용인해야 하나
주권재민의 새로운 공화국 열어야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세 번이나 넘기면서 87년 체제를 둘러싼 논란도 확산하고 있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미개하기 짝이 없던 간선제 시대를 끝장내고 국민이 제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로 민주주의는 일취월장했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늘도 짙어지고 있어서다. 먼저 직선 대통령에게 과다하게 권력이 집중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에 관한 반론이 만만찮게 제기되었다.
올해로 부활 30주년을 맞은 지방자치도 한계를 드러냈다. 1991년 기초·광역자치단체 의회 선거에 이어 1995년 기초·광역단체장도 함께 뽑는 동시지방선거가 시작되었지만 자치분권의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 현행 헌법이 제정 공포된 10월 29일을 기려 ‘지방자치의 날’이라 하지만 그 헌법이 되레 자치분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6공화국 헌법으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가하기에 제약이 큰 탓이다.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은커녕 이대로 가다가는 지방이 모두 없어질 판이라는 데 더 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자본과 삶의 인프라가 서울과 경기에만 쏠리는 수도권 일극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수도권으로 몰려가고 있다. 지방소멸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 균형발전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수사에 불과했다. 공수표로 끝난 문재인 정부의 ‘공공기관 2차 이전’이 대표적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위시한 중앙집권형 현행 헌법은 효용과 효율을 잣대로 일사불란한 권력체계와 국가 운영을 요구한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 서울이고 지방이고 따질 게 뭐 있나”라는 식의 가치관이 퍼지면서 권력은 더욱 중앙집중화되고 있다. 봉건제가 발달한 서구와 달리 지방에 관리를 보내 다스리던 왕조시대의 관습법까지 더해져 중앙집권은 더욱더 강고해진다.
선거도 중앙집권형이다. 모든 선거가 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지방선거는 대선이라는 큰 선거판에 묻혀들어가기 일쑤다. 대선판에 따라 지방선거판이 출렁이고, 대선판에서 제 몫을 해야 지방 공천이라도 딸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위로부터의 민주주의’만 있을 뿐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역사적 경험이 일천한 데다 제도적 뒷받침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정당 공천 없는 교육자치 선거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학계로부터 “교육자치는 없고 교육감 독재만 있다”는 비판을 받는 광역교육감을 뽑는 선거의 경우 진보와 보수로 진영이 갈린 교육감 권력 쟁탈전으로 비화한 지 오래다. 전선이 비교적 단순한 까닭에 내년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독 교육감 선거만 과열 양상을 보인다. 3선에 도전하는 부산시교육감 김석준·경남도교육감 박종훈, 재선에 도전하는 울산시교육감 노옥희가 공교롭게 죄다 진보로 분류되는 바람에 벌써 보수 단일화 움직임이 한창이다.
건국 이래 여섯 번째 공화국을 통과하고 있지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공화 정치가 진정으로 꽃핀 공화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공화국은 더는 권력집중적일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되었고, 실제 분권개헌을 추진했지만 모두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이제 임기 말에 봉착해 있다.
자치분권의 제7공화국은 지금으로선 다음 정권에 가서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87년 체제가 수도권의 일극주의와 지방의 소멸을 초래한 까닭에 이 체제를 바꾸지 않는다면 지방의 살길은 없다는 사실을 오늘의 현실이 똑똑히 보여 주고 있다. 지금 지방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의 외침이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성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fores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