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파시즘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예술철학자
어젯밤 꾼 꿈이 아무리 복잡하고 뒤숭숭해도 알레고리적 꿈은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도 알레고리인 꿈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위장해서 묘사하는 것이 ‘알레고리(allegory)’라면,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서 그렇지 알레고리로 해석해야 온당한 예술작품들을 새롭게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코로나 시국에 같은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자주 소환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재해석을 받을 만한 문학작품이다.
혹여 오해하듯 <페스트>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전쟁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니라 다름 아닌 파시즘의 알레고리, 작가 자신이 몸소 경험하고 저항한 바로 그 파시즘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페스트>의 의미를 이렇게 제대로 자리매김했다고 해서 이 작품의 현실적 파급력에 후한 점수를 주는 건 아니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때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인 1947년이니 사실 이 작품은 현실에 많이 지각한 셈이다. 페스트의 공포가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있고 난 후에도 주인공 의사가 축하하는 군중의 무리에 함께할 수 없었던 건 이 군중들 대다수가 곧 망각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집단 전염병에 걸릴 것이라고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의 원인을 타자에게 전가
적을 만들어 불안·공포·증오 조장
비이성의 유혹에 허무하게 굴복
한국 사회, 파시즘의 위협 현실화
내년 3월 대한민국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두 후보 진영 모두가 상대방 진영을 향해 파시즘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어느 한 쪽은 분명 무지나 의도에 기반을 두는 억지 선거 전략일 것이고, 다른 한쪽의 지적은 상당 정도 타당한 면이 있을 테다. 어쨌거나 우리 사회에 파시즘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한 점일 수도, 떼일 수도 있는 먹구름 말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쓰고 있는 ‘먹구름 한 점’은 사실 히틀러가 쓴 표현이다. “먹구름 한 점이 폴란드를 위협하고 있소. 우리는 군인들이, 신앙심이 깊은 군인들이 필요하오. 신앙심이 돈독한 군인들이야말로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소이다. 귀하는 여기에 모든 것을 투입하시오.”
여기에서 히틀러가 말하는 먹구름은 폴란드에 대한, 임박한 군사 작전을 가리키고 또 그가 ‘귀하’라 부르는 인물은 독일 오스나브뤼크 교구의 주교 빌헬름 베르닝으로서, 당시 프로이센 주 총리였던 헤르만 괴링에 의해 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원으로 임명된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임명되고 3개월 정도가 지난 1933년 4월 26일에 있었다. 이후 나치 정권과 독일 가톨릭교회 간의 유착은 질기고 악명 높았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파시즘의 현실화라는 위협에 맞닥뜨리고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쪽으로부터가 아니라 이른바 적폐 세력으로부터 나온다. 이 점이 유럽에서 20세기 초반에 출현한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파쇼 정권과 다른 점일 것이다. 현재의 적폐 세력은 과거에 실제로 파시즘적 권력을 휘두른 전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 화려한 과거와 마약과도 같았던 권력의 맛에 더할 나위 없는 강렬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파시즘(fascism)이라는 용어를 굳이 번역하자면 ‘도끼주의’다.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행진을 할 때 맨 앞에 내세운 나뭇가지 다발에 싸인 도끼가 ‘파스케스(fasces)’였던 것이다.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파시즘은 워낙 카멜레온같이 변신이 잦아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건 사실이나 어떤 연구자건 파시즘의 기본 특징으로 꼽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지금 겪고 있다고 느끼는 불만, 불안, 불신, 고단함과 국가의 쇠퇴와 도탄이 모두 어떤 타자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부정의 사고와 행동 체계다. 파시즘은 막무가내로 타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희생양 만들기의 수준 낮은 정치사상인 것이다. 파시즘이 적을 만들어 내는 건 대중의 불안과 증오와 공포를 조장하고 이에 편승해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퍼뜨리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반지성주의, 달리 말해서 비이성의 유혹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넘어가는 대중 인간의 존재이다. 이성의 언어에 미숙하고 사유보다는 충동적 행동에 익숙한 대중 인간은 몸의 언어만을 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반지성주의와 관련해서 나치즘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에 그가 붙이는 주해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수백 년에 걸쳐 찬양받아 온 이성이야말로 사유의 가장 완강한 적대자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 비로소 사유가 시작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