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나라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최혜규 사회부 차장

‘이게 나라냐’는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의 단골 구호였다. 세월호 사태에서 국정농단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정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전횡에 대한 국민의 절망과 분노가 담겼다. 탄핵 직전 나온 한 성명서에도 등장한다.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이게 나라냐’.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 명의의 이 성명서는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차별금지법 입법 시도에서 1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중에’를 말하는 정치권을 비판하고 광장에 연대를 호소한다.

그로부터 4년, 그들은 ‘촛불 정권’의 임기가 반 년도 남지 않은 2021년 12월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리라고 예상했을까. 그동안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미투 운동’이 있었고, 고용 안정성은 무너졌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고, 약자 혐오는 노골적이 됐다. 그리고 변희수 전 하사는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 팬데믹은 누구나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 조사에서 국민 88.5%는 평등권 보장을 위한 법률 제정에 찬성했다. 1년 전 조사(72.9%)보다 늘었다.

국회는 무얼 했나. 21대 국회는 정의당 정혜영 의원에 이어 더불어민주당에서만 3개의 차별금지법(평등법) 법안을 발의했다. 국민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해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 10만 명 요건을 채웠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두 활동가는 10월 12일 부산을 출발해 서울 국회까지 30일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시민들이 함께 걸었다. 행진단이 서울에 도착한 날, 국회는 법안 심사 마감 기한을 간단히 2024년 5월로 연기했다. 다시 4년 뒤다.

정부는 무얼 했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국가인권위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인권이나 차별금지에 관한 기본법을 만들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고 “우리가 인권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필요한 언급이지만 늦었다. 2012년 대선 공약에서 서서히 물러나 취임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외할 때부터 의지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번 대선은 명백한 후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신중론을 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형사법 집행’을 언급하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차별금지법(평등법) 법안에는 형사처벌 조항이 없다. 급기야 더불어민주당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자며 주최한 토론회에 동성애 ‘전환치료’를 주장하는 목사를 패널로 불렀다.

이제는 모두 안다. 진짜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인권을 표로 계산하고, 책임 방기를 넘어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는 국회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최초의 나라, 경제적 성공과 활기찬 민주주의가 결합한 소프트파워 강국을 자랑하기 전에 국제사회의 기준에 맞는 인권기본법을 갖추자는 것은 더 이상 급진적인 요구도 아니다.

국민의 존엄과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차별을 용인하는 나라, 차별금지법도 못 만드는 나라는 선진국이라고도, 민주공화국이라고도 할 수 없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쟁취를 위한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iwill@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