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 말고 집에서 도란도란” 노인 주거문화 새 길 열다
홀로 사는 김 모(78·여·부산 부산진구) 씨는 지난달 아침 피투성이로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보니 침대에서 떨어져 침대보와 옷에는 온통 핏자국이 가득했다. 혈압이 높아져 코피가 잦아진 탓이다. 홀로 사는 데 버거움을 느낀 김 씨는 주민센터 측 도움으로 ‘도란도란 하우스’를 소개받았다. 노인들이 함께 거주하며 서로 돌보는 부산진구의 커뮤니티 하우스로, 김 씨는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들과 살기 위해 이곳 입주를 결심했다. 그는 오는 12일 도란도란 하우스에 들어가는 첫 입주자다.
부산진·북구 지역통합돌봄 시동
노인 새 주거실험 커뮤니티하우스
공동체 공간 오순도순 ‘노노돌봄’
“의지할 친구 함께 있어 좋아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부산 최초로 부산진구와 북구에서 지역사회통합돌봄 정책 현장이 선보였다.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 주거와 돌봄을 동시에 해결하는 ‘노노(老老)돌봄’을 실현한다.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 서로 돕는 돌봄 형태다. 요양원 등 노인시설이 아닌, 살고 있던 지역사회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노인들을 위해 지자체가 팔을 걷고 나선 것이다.
부산진구 첫 커뮤니티하우스 ‘도란도란 하우스’는 지난달 29일 문을 열었다. 오는 12일 첫 입주자를 받는다. 이 집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총 12인실이다. 65세 이상의 혼자 사는 부산진구민이면 누구나 입주를 신청할 수 있다. 보증금은 500만 원으로 한 달 월세는 18만 원 수준이다. 입주자들은 최대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 2년 단위로 계약이 이뤄지는데 10번까지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 입주자들은 각자 합의한 규칙에 따라 시설을 이용하고, 식사부터 프로그램까지 스스로 운영해 나간다.
도란도란 하우스는 정부의 지역사회통합돌봄 기조에 따라 마련된 사업이다. 2019년 보건복지부의 ‘지역사회통합돌봄 선도사업’에 부산진구와 북구가 선정되면서 두 지자체는 통합돌봄 주거모형을 개발했다. 현재 부산진구는 커뮤니티 하우스 ‘도란도란하우스’를, 북구는 돌봄지원주택 ‘도담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두 곳 모두 노인들을 위한 사업으로, 요양원이나 병원 등 시설이 아닌 살고 있던 동네 안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부산에서 지자체가 새로운 노인돌봄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기준 부산시 고령화 비율은 19%다. 부산은 국내 광역도시 중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고령화율 20% 이상)에 진입하고 있다.
도란도란 하우스 시설은 오로지 ‘노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취재진이 6일 오후 1시께 찾은 초읍동 도란도란 하우스. 건물 1층에 선 승강기는 도착하자 수차례 ‘띠띠띠띠’ 큰 소리로 알림음을 냈다. 귀와 눈이 어두운 노인들을 위해 층수를 인지하기 쉽게 고안된 것이다. 남·여로 구분된 3·4층 숙소 또한 방문 모양부터 다르다. 모든 손잡이는 키가 낮은 노인을 위해 허리춤 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화장실 변기와 세면대 곳곳에 안전대가 설치돼 있고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위험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김 씨는 이곳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 씨는 “요양병원에 가면 ‘죽으러 간다’는 생각만 들지만 이곳에서는 기력이 될 때 내가 죽이라도 줄 수 있고 아플 땐 따뜻한 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서로 의지할 친구가 있어 좋다”고 말했다. 도란도란 하우스 김경보 팀장은 “어르신들이 혼자 살다 보면 갑자기 쓰러져도 아무도 몰라 방치되는 일이 다반사”라며 “이곳에선 어르신들이 정서적, 육체적으로 훨씬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성대 김영종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는 가운데 노인 돌봄은 더 이상 가정 또는 민간의 유료 서비스만으로 지탱하기에 한계가 있다”면서 “노인의 수명만 연장하는 일방적인 방식이 아닌 노인이 지금까지 지내온 공간과 방식을 존중하는 지역사회 돌봄은 삶의 존엄성을 지켜준다”고 말했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