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민주시민 교육의 요체는 교양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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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원 폴리컴 대표

지난 11월 24일 교육부는 ‘국·영·수·사·과’ 등 공통 과목을 축소하고 ‘민주시민 교육’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2025년 고교 학점제 전면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시대에 부응하는 민주시민 교육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1997년 국회에서 ‘민주시민교육지원법안’이 발의된 이후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정치권이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사회적 합의가 배제된 채 일방적으로 추진된다는 게 우려스럽다.

이념 갈등이 심각했던 1976년 독일의 경우 좌우 진영을 포괄한 학자와 정치교육 주체들이 보이텔스바흐에 모여 정치교육 대원칙에 합의했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첫째 정치교육에서 교화 및 주입식 교육 금지, 둘째 논쟁 사안을 논쟁 그대로 소개, 셋째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자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 함양과 정치 현실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능력 배양을 원칙으로 정했다.

교육부 민주시민 교육 강화안 발표
현재 정부 방침에 따라 전국서 붐
사회적 합의 없는 일방 추진에 우려

‘생각의 자립’ 등 취지 자체는 긍정
이념적 교화·주입식 방법은 안 돼
교육 내용의 이해, 핵심 전제 조건


뉴질랜드는 민주시민 교육의 중립성을 위해 교장·교사·학부모의 학교운영위원회 감독을 받게 하고 있다. 특정 이념 주입 금지를 위해 시민교육 교과서도 없앴다. 호주 교사들은 민주시민 교육 수업 중 학생들에게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스스로 토론을 통해 중립·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한다. 네덜란드 정치교육 기관 ‘프로데모스’는 이론 수업이 아닌 학생들의 의사결정 토론을 통해 생각이 다른 상대와 타협하는 방법을 찾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민주시민 교육의 핵심은 ‘이념적 중립’과 ‘비판적 사고’, ‘생각의 자립’이다. 기존 교과 과목을 줄인 민주시민 양성의 취지는 좋다. 그러나 극단적 정치 진영화에 잠식되고, 밥그릇 지키기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는 정치권이 과연 민주시민 교육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이념적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치단체장, 교육감, 의회가 동질한 이념 성향이 있는 지역이 많은데 과연 균형 잡힌 교육 과정 수립이 가능할까.

민주시민 교육의 요체는 ‘교양 시민’을 키우는 일이다. 교양 시민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 공동체에 대한 책임, 더불어 사는 주체들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체화한 시민이다. 민주시민은 단지 교화와 주입으로 길러지는 게 아니다. 자기만의 생각을 키우고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답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는 읽기, 쓰기, 토론하기의 교양 교육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교양 교육은 시민성을 강화하고 비판적 민주시민을 만든다. 인간 본성과 다양한 인간 삶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생긴다. 상대의 욕망과 이기심을 인정해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자란다. 이는 읽고 쓰고 토론하는 자유로운 교양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민주시민이란 선과 정의, 올바름으로 무장한 획일화한 도덕적 시민이 아니다.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 시민’이다. 사회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정치적 시민’이다. 자아실현을 위해 공정과 배려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공동체적 시민’이다. 민주시민 교육은 인간학이고 인문학 교육이다. 서로의 욕망을 존중하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야 상호 인정과 사회적 신뢰가 생겨난다.

학생들이 어휘를 몰라 수업 진행에 난항을 겪는 심각한 상황은 기본적인 읽기와 글쓰기 교육이 되지 않아 생긴 문제다. 읽지 않으면 글쓰기가 안되고, 글쓰기가 안 되면 자기 생각을 할 수 없고, 자기 생각이 없으면 질문을 할 수 없다. 질문이 없는데 어떻게 비판할 수 있으며,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창조적 인재가 나오겠는가. 극렬한 정치 팬덤과 극단적 정치 진영화도 자기 생각 없이 군중에 휩쓸린 결과다.

민주주의는 이론 교육보다 관용·배려·타협이라는 민주적 소양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민성은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 자기 이익을 관철하는 표현력과 설득의 힘이 있어야 한다. 인문적 교양이 허약한 토대 위에서 민주시민 교육은 자칫 특정 요소만 강요하는 이념적 교화와 일방적 주입 교육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 진영화와 사회 갈등은 허약한 인문적 토양에서 자란 위태로운 결과물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현재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국적으로 민주시민 교육 붐이 일어나고 있다. 3년 전 부산시의회 기획행정위원회에도 ‘부산시 민주시민 교육 조례안’을 일방적으로 가결했지만 보수 성향 단체 등의 반발로 갈등만 야기했다. 최근 기초지자체 의회에서도 민주시민 교육 조례를 만들고 있다.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교육 주체들이 따라오는 민주시민 교육 정책이 과연 민주시민의 핵심 요체인 ‘교양 시민’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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