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마음속 밑바닥을 두드려 보면
서정아 소설가
취미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 두 달째다. 이쯤이면 어쭙잖게나마 나무와 꽃 정도는 그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꿈이 너무 컸나보다. 정육면체와 직육면체, 그리고 원통과 구. 딱딱하고 엄격한 입체 도형의 세계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4절지 스케치북에 선만 긋던 처음 몇 주 동안이 거의 마음 수양의 시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제법 즐거운 마음으로 도형을 그린다. 선에 비하면 입체 도형이란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답기까지 한가 생각하면서 말이다.
정육면체 석고 모형을 책상 위에 놓고, 같은 흰색이라도 빛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으므로 그것을 잘 표현해 보라는 선생님에게 한 수강생이 말했다. “다 똑같은 흰색으로 보이는데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나도 실은 그렇게 보였으므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고, 한 면에서도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이 있다고, 그림을 그리려면 사물을 오래 바라보고 자세히 관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얀 정육면체 석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나의 물체를 가만히 오랫동안 응시하는 일은 일종의 명상 같았다. 한참 동안 한 곳에 주의를 기울이자, 대충 보아서는 결코 보이지 않던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은 흰색으로 이루어진 물체인데도 빛에 따라 윗면과 옆면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고 한 면 안에서도 음영의 차이가 있었다. 그걸 배운 지금, 나는 주변 사물의 색채를 다시금 인식하는 중이다. 밋밋해 보이던 사물 하나하나가 달리 보여서 세상이 조금 새롭다.
소설을 쓰다 보면 한 인물에 대해 깊이 천착하게 된다. 시각적인 것에 집중해야 하는 그림과는 다르지만, 소설의 인물 역시 글로 표현하기 전에 오래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예컨대 종일 집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은둔형 외톨이 청년이 있다고 치자. 우리는 그를 보며 혀를 쯧쯧 차고 한심해하기 쉽다. 옆에서 잔소리를 퍼붓거나 한숨을 쉬어댈 수도 있고, 술자리의 가벼운 가십거리로 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쓰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그의 과거에 대해, 그가 한때 꾸었던 꿈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한 인물을 다면적으로 관찰하고 그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두 가지 언어로 쉽게 평가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정육면체의 모든 면이 전부 똑같은 흰색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설령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편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나쁜 일들을 매번 운 좋게 피해가며 성공가도를 달려가는 이를 볼 때면 우리 마음속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싹트겠지만, 전지적 시점에서 그의 내면과 외부세계를 통시적으로 바라보면 그런 일차적 감정은 내려놓게 된다. 대신 그를 둘러싼 벽면의 미세한 균열을 알아채고, 평온해 보이는 표정 속에 숨겨진 깊은 불안을 짚어보게 되는 것이다.
‘무사태평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밑바닥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모르게 모두 슬픈 소리가 난다.’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중에서)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 결국 인간으로 태어나 분투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연민이 싹튼다. 내가 아껴둔 마지막 파이 한 조각을 무심코 집어먹어 버리는 얄미운 누군가를 보고도 자비심이 생기고, 회의 한 시간째 혼자 열변을 토하는 직장 상사의 얼굴도 안쓰럽게 바라볼 수 있다. 남의 파이를 집어먹는 이의 근원적 허기는 무엇인가 생각하고, 언제나 말이 생각을 앞질러 버리는 이의 어쩔 수 없는 조바심을 떠올려본다.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입체도형을 그리듯 인내심을 갖고 훈련해볼 만한 일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