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어떻게든 우리는 함께 살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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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얼마 전 프로그램 디렉터로 참가했던 제17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이 막을 내렸다. 이번 전시의 대주제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였다. 원래 지난해 열려야 했지만 팬데믹이라는 엄중한 시국 때문에 부득이 올해로 연기한 행사였다. 다소 나아진 상황 덕분에 수많은 관람객들이 한국관을 방문해 ‘미래학교’라는 전시 주제를 되새겼다. 아쉽게도 한국이 수상하진 못했지만, 한국관 전시를 총괄한 신혜원 감독이 앞장서서 조직한 큐레이터 컬렉티브(CC)는 기존의 비엔날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큐레이터 컬렉티브는 비엔날레라는 민족국가 단위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국제 협업을 처음으로 시도했고, 그 결과가 각 국가별 전시에 반영되었다. 크게 보도되진 않았지만 이런 ‘국제 공조’의 노력은 팬데믹이라는 현실적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한 귀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7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새로운 시도
국제 협업 통한 전시, 관객 참여 유도 주목
‘위기 극복과 더불어 사는 삶’ 생각하게 해

한국관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신 감독은 기후 위기와 환경 문제를 고민한다는 취지의 행사가 정작 현실에서 전시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아이러니에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처음부터 ‘전시를 위반하는 전시’라는 파격적인 방식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빈 공간’으로서 한국관을 설정하고 관객이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여러 행사를 기획했다. 참가자들이 베니스 전시장에 가지 않고 거의 모든 행사를 온라인으로 진행하자는 신 감독의 제안에 나 역시 취지에 공감하면서 ‘강의 퍼포먼스’를 행사의 일부로 계획했다. 놀랍게도 이런 논의는 팬데믹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인데, 그 이후 상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비상사태로 나아갔다. 미리 상상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 들이닥친 것이다. 이보다 더 극적인 실재의 응답을 어떤 사례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에게 2021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은 상상과 현실 사이가 우리가 믿는 것보다 더 가깝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였다. 신 감독이 큐레이터들의 집단행동을 호소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안이하게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고, 상상은 상상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상한 것은 언제든 이루어진다. 그때가 언제인가의 문제일 뿐,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언젠가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이런 의미에서 그 많은 인문학자들이 상상의 능력을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일 테다. 올바른 상상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많은 상상의 가능성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개방성이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내가 경험한 한국관은 그 개방성이 무조건 비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줬다.

예를 들어, 한국관 옆 독일관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텅 빈 공간을 조성하고 하얀 벽면에 QR코드만을 붙여 놓았다. QR코드를 휴대폰으로 스캔하면 가상공간으로 진입해 여러 전시를 체험할 수 있는 설계였다. 그러나 이런 설치는 표면적으로는 분명 비어 있지만, 실제로는 공간 자체가 압도적이어서 관람객이 자유롭게 진입하기 어려운 전시이다. 게다가 QR코드를 이용해 가상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설정도 기술 장벽의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보기에 따라서 이런 독일관에 비해 한국관은 무엇인가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앙에 자리 잡은 갈대로 만든 카펫이나, 관람객들이 직접 차를 끓이고 간단한 음식까지 할 수 있게 만든 공간 구성은 아예 아무것도 갖다 놓지 않은 독일관과 비교하면 확실히 뭔가 채워진 공간이다.

그러나 채움이나 비움의 문제는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다. 둘은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다. 독일관의 비움은 사실상 테크놀로지의 일방성을 구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질적인 차원의 비움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에 비해 한국관의 비움은 조리기구라는 테크네(techne)를 설치함으로써 테크놀로지의 유연성을 관람객이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말하자면, 한국관은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처음엔 안내도 없는 전시에 당황하다가 곧 익숙하게 공간의 일부로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주어진 도구를 이용해 자신들만의 테크놀로지를 실현했다. 강의 퍼포먼스를 하는 와중에 관람객들 중 일부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 스스럼없이 참여해 강연자와 질의응답을 나누기도 했다. 단순히 전시된 사물들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 스스로 전시의 일부로서 기꺼이 참가한 것이다.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취지를 이보다 더 잘 구현하긴 쉽지 않을 터. 시국은 엄중하지만, 그럼에도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생명은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어떻게든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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