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원전이 폐기물까지 떠안을 판… 선거 전 발의 의도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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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동 걸린 고준위 특별법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돼 기존 원전이 사용후핵연료의 영구 저장시설을 떠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준위 방폐장 설치는 오래도록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2019년 고리1호기 원자로 건물과 사용후핵연료 저장조를 살펴보는 원자력안전위원회 관계자들. 부산일보 DB

더불어민주당은 올해 9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하면서 그 핵심 취지로 “영구처분장 마련 절차를 만들고, 사용후핵연료(고준위 폐기물)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구처리시설이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 기존 원전이 고준위 폐기장을 계속 떠안을 공산이 크다.

영구 방폐장 건설 15년째 제자리
비원전 지역 의원 주도… 한수원 대변
친원전 측에 해결책 내라는 메시지 뜻
대선 레이스 민주당 내부도 고개 갸웃


■영구처리시설, 15년 넘게 제자리

현재 한국은 24기의 발전용 원자로를 운영하며 50만 다발 이상(중수로 포함)의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내에 임시로 보관 중이다. 원전 내 보관시설은 2031년 전남 영광 한빛원전부터 순차적으로 포화한다. 정부의 2차 기본계획에 따르면 사회적 합의가 원만하더라도 영구처분시설 마련에 37년이 필요하다. 하루빨리 특별법을 제정해 고준위 방폐장 건설 논의를 시작해도 이미 늦었다. 민주당의 특별법 신속 추진 명분이다. 야당은 물론 원전 지역 시민사회도 이 명분에 이견이 없다.

문제는 특별법 제32조다. 해당 조항은 ‘원자력발전소 부지 내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의 설치 운영’에 관한 것이다. 별도의 고준위 폐기물 관리위원회 승인을 거쳐 부지 내 저장시설 건설계획을 수립하고 주변 지역 주민 의견수렴과 지원방안 마련 절차를 규정했다. 다른 원전에서 발생한 폐기물의 이동을 제한하고 외부에 중간시설이나 영구처분시설이 확보되는 즉시 사용후핵연료를 내보내도록 했다. 영구시설을 만들 때까지 원전 부지에 사용후핵연료 임시 저장시설을 만들겠다는 의미다. 뒤집어보면 영구처리시설이 확보되지 않으면 원전 부지가 그대로 고준위 폐기장을 떠안게 된다는 얘기다.

현재의 논의 구조에서 기피 시설인 고준위 방폐장 마련은 장담할 수 없다. 부지 내 저장시설이 영구처분시설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결론이 현실에는 더 가깝다. 실제 1986년 경북 울진부터 2004년 주민투표를 거친 전북 부안까지 방폐장 건설은 번번이 무산됐다. 이후 정부 차원의 사용후핵연료 공론화가 이뤄졌고 이달 정부의 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나왔지만 뾰족한 해법은 없는 상태다. 주민 수용성을 높여 부지를 확보하고 지원대책을 마련해 영구처리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론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15년 이상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눈치게임을 벌이는 셈이다.

민주당의 이번 특별법 추진도 별반 차이가 없다. 당장 이 법안은 2018년 20대 국회에서 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발의했다가 폐기된 법안과 사실상 내용이 같다. 논란의 32조는 우 의원 법안의 30조와 같다. 달라진 점은 우 의원 법안은 ‘임시저장시설’이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임시라는 말을 빼고 ‘부지 내 저장시설’이라고 한 정도다. 논의 진전이나 고민이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탈원전 회귀 차단 포석?

민주당 내부에서도 법안 추진 배경에 대해 ‘의아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는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원전 지역에서 반대 여론이 큰 특별법을 꺼내든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굳이 이유를 찾자면 올해 4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에 대한 권고안이 나왔고 이에 맞춰 5년 단위로 발표하는 2차 기본계획이 12월에 나오는 상황에서 당·정 협의에 따라 특별법을 발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는 산업부와 원전 사업자인 한수원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의미로 비친다. 실제 이번 특별법에 서명한 김 의원 등 24명의 민주당 의원 지역구에는 원전이 전혀 없다. 지역 주민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야당에서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법안이 발의됐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문재인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한 탈원전 정책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탈원전 회귀를 막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특별법을 띄운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쪽에서 사용후핵연료 등 골치가 아픈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내놔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 같다”고 했다. 원전을 계속 고집할 경우 방폐장 확보 등 난제에 부딪힐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고 정부·여당이 의도적으로 특별법을 띄웠다는 의미다.

다행히 현재 분위기를 보면 12월 임시국회에서는 국회 산자위 법안 소위 상정 가능성이 작다. 내년 3월 대통령선거와 6월 지방선거 등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고준위 특별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내년 하반기에 시작될 공산이 크다. 지역 정치권에선 이에 맞춰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법 마련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의 한 의원은 “원전을 돌리면 폐기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다”며 “공론화를 통해 지역 주민의 의사를 묻고 이에 따라 대책을 마련하는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민지형 기자 oas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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