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충렬사 안락서원
충렬사 안락서원(安樂書院)의 시초는 선조 38년(1605) 동래읍성 남문 쪽에 지은 송공사(宋公祀)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기리고자 매년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인조 2년(1622)에 이르러 나라로부터 충렬사(忠烈祀)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동래구 안락동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건 효종 3년(1652) 때의 일이다. 기존 충렬사가 낮은 곳에 위치해 습기가 많은 데다 성문과 가까워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사당을 옮기면서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강당도 함께 만들었다. 이때부터 불린 이름이 바로 안락서원이다. 제향 공간과 더불어 교육의 기능까지 두루 갖췄다는 의미다.
안락서원은 조선 후기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다. 충신열사를 모신 까닭에 국난극복의 교육장으로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건물들은 점차 낡고 허물어져 갔다. 일제는 1년 중 두 차례의 제사마저 가로막았다. 광복 이후 정국 혼란 속에 방치되던 안락서원은 1976년 정부 정화사업 때 모든 건축물이 철거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 자리에 경역을 훨씬 넓힌 새로운 충렬사가 들어섰으나 본래의 모습은 크게 훼손된 뒤였다.
지금 전국에 남아 있는 사액서원은 총 47곳이다. 군사분계선 북쪽에 위치한 11곳을 뺀 남쪽 36곳 중 유일하게 안락서원만이 소멸된 상태로 어두운 과거 속에 묻혀 있다. 조선 시대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적 기반의 공간 원형을 잘 간직했던 곳이 안락서원이다. 역사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 장소로 되살릴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부산의 기상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문화 콘텐츠 및 관광도시 브랜드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한국 서원의 한 축으로서 공간 회복의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복원을 위한 부산시의 노력이 그동안 없지는 않았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최근 부산시가 안락서원의 원형을 찾는 연구용역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내년 2월부터 안락서원의 옛 모습이 어땠는지 자세히 조사해 도면 형태의 기록을 남길 계획이라고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락서원은 두 가지의 기록과 기억이 중첩돼 있다. 1652년 처음 지었을 때와 1976년 새로운 충렬사가 건립됐을 때가 그것이다. 내용과 성격이 다르지만 모두 역사와 문화의 자산이다. 철저한 원형 기록 및 기초자료 수집, 고증 연구를 통해 서원 복원의 진정한 토대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