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부족국가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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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자신이 집권하면 30대 장관이 많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부인 김건희 씨 의혹이 커지면서 2030세대 지지율 하락에 따른 청년 공략용이라는 해석도 나오지만 어쨌든 청년 인사 중용 방침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한국의 현직 장관 평균 나이는 60세가 넘는다. 젊은 정치인들은 우리 정치에 새바람을 불러올 것이다. 가브리엘 보리치는 35세의 나이에 칠레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7년 39세의 나이로 프랑스 대통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을 비롯해 오늘날 세계는 젊은 지도자들이 약진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까지 거론하다 보니 라시다 다티 전 프랑스 법무부 장관이 떠오른다. 다티는 장관 재직 중에 임신해서 2008년 출산했다. 미혼인 데다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 함구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에도 화제가 되었다. 만약 2021년 한국에서 미혼의 장관이 임신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다티 장관의 출산을 국가적 경사이자 프랑스가 시험 중인 새로운 남녀 관계의 성공 사례로 평가했다. 프랑스에서 동거나 사실혼은 법적으로 가족 형태의 하나로 인정돼 사회보장과 양육비 같은 제도적 보호를 받고 있다.

‘조동연 사태’ 혼외자 논란
적자·서자 타령 시대착오적

세계는 젊은 지도자들 약진
우리 정치판 세대교체 절실

진보·보수 가치관 달라도
사생활은 서로 존중했으면


이달 초만 해도 국민 관심사였다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해진 ‘조동연 사태’를 복기해 보자. 한 개인의 사생활이 세상에 낱낱이 까발려져 우리 사회가 얻은 이익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유력 일간지인 르몽드는 “조동연 교수의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상임위원장직 사퇴는 사생활 존중이 어려운 한국 사회를 잘 보여 준다”라고 평가했다. 르몽드는 또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여성 차별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 한국 사회의 미혼모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프랑스식 사고가 꼭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풍경도 조금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터부시되는 단어 ‘혼외자’가 다시 소환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혼외자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생아다. 오죽하면 사생아는 1991년까지 수형자, 혼혈아, 고아, 귀화자 등과 함께 병역 면제였을까. 배우 손지창도 사생아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는 다른 연예인들이 병역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면 같이 비난을 받는단다. 배우 성동일이 “사생아로 태어나 지금까지 결혼식도 못 올리고 애 셋을 낳고 살았다”라고 고백한 게 2018년이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정치인들의 적자·서자 타령을 들을 때마다 우리 정치판에 세대교체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은 경선 과정에서 ‘누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적자인지’를 따졌다. ‘적자, 서자, 얼자, 맏며느리’까지 들먹여서 눈총을 샀다. 국민의힘 홍준표 의원도 보수의 적자는 자신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의힘에 합류한 장성민 전 의원은 지금도 ‘DJ의 적자’라고 주장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김 전 대통령을 욕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내 어머니는 평생 작은댁으로 사셨다”면서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김 전 대통령은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 드리고 싶었다”라고 했다. 서얼을 차별하는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철폐되었다. 자기가 적자라고 주장하는 정치인은 갑오개혁을 경험하지 못한 임오군란 즈음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부족사회’는 친족 집단의 혈연성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한 사회에서 형성된 국가를 ‘부족국가’라고 부른다. 혼외자를 사회에서 없는 사람 취급하고, 적서를 차별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은 아직도 부족국가의 면모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부족에도 변화의 조짐이 느껴지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일본 출신의 방송인 사유리는 지난해 ‘비혼 출산’을 한 뒤 올해 한 육아 예능에 출연했다. ‘비혼모 출산 부추기는 방송 중단해주세요’라는 글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지만, 사유리를 응원하는 내용도 많았다. 사유리의 비혼모 행보에 미혼모·미혼부들은 크게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사유리는 한국 사회에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답은 서로 달라도 남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존중해 주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덧붙이자면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잡스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그랬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마침 이 땅에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아기 예수가 오신 크리스마스도 다가오지 않는가.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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