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신춘문예-평론] 길 잃은 현존재들의 시간 - 찰리 카우프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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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방향 상실의 로드 무비

영화의 원제는 ‘i’m thinking of ending things’다. ‘이제 그것들을 끝낼 생각이다’이거나 ‘나는 끝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이다. 주인공 루시는 만난 지 6, 7주 된 남자친구 제이크의 가족을 만나러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루시는 처음부터 끝나는 것, 끝낼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끝까지 그 생각을 따라간다. 영화는 고전 영화의 1.33:1의 좁은 화면비를 활용하면서 루시와 제이크의 대화와 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가 시작한 후 30분 동안 자동차 안에서 루시와 제이크의 대화를 보여주고 다음 30분간은 제이크 부모와의 이상한 사건을 보여준다. 남은 1시간은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루시는 끝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상한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영화는 가장 기이한 로드 무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조리극의 스타일을 활용하는 영화는 이상한 회귀의 여정 속으로 관객을 이끌고 간다.

영화의 주제의식은 하이데거의 저작 과 이어진다. 시간의 인식과 불안 같은 것들이 그러한데 하이데거는 인간을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더한 현존재라는 개념으로 일컫는다. 존재는 시간화하며 세계 속에 공존한다. ‘나’를 현재라는 시간성 속에서 밝혀내고자 했던 시도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여정과 맞닿아있다. 본 비평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에서 드러난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읽어낼 것이다.



1. 분절된 순간의 중첩과 반복

영화는 끊임없이 중첩의 과정을 거친다. 모든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 그렇고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 루시는 제이크고 그의 부모이기도 하며 청소부, 털시 타운의 직원이기도 하다. 루시의 직업은 물리학자였다가 화가, 영화 전문가, 노인학 학생, 웨이트리스가 된다. 제이크의 집에서 본 어린 시절 사진은 루시의 어린 시절로 착각되고 제이크 부모의 집에서 돌아올 때는 루시와 제이크의 성격이 바뀌기도 한다. 제이크는 울 것 같다가도 마치 그런 대화를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갑자기 장난기가 있는 성격으로 바뀐다. 브르르 때문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핸들을 친다. 루시는 신경질적이었다가 이내 차분해진다.

사건 역시 중첩 혹은 대체의 과정을 거친다. 둘은 식사를 회상하는데 제이크는 영화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와 루시의 대화는 잘 통했고 루시는 와인을 많이 마셨다. 루시는 제이크 부모의 집으로 가는 도중 살면서 가장 많은 헛간을 봤다고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농장이 있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말한다. 루시는 제이크가 자신을 에임스라고 부르는 걸 듣고 생경해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자신이 준 정보를 반박하고 갱신하는 방식을 반복한다.

영화에서 제이크와 가장 많이 겹쳐 보이는 사람은 털시 타운의 직원과 청소부다. 제이크와 청소부가 건네주는 슬리퍼가 같고 제이크의 세탁기에 있던 R이 쓰인 옷과 청소부의 옷이 같다. 청소부가 강당에서 연습하는 배우들을 쳐다보는 것은 마치 그가 뮤지컬 ‘오클라호마’를 연기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듯하다. 차에서 떠나지 못하는 청소부는 제이크 부모의 다툼과 루시가 집으로 오던 날의 제이크를 떠올린다. 시점 쇼트로 제이크를 비추기에 이 시선은 루시의 것 같기도 하다. 제이크는 학교에서 배척당한 부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때 인서트 장면의 학생은 털시 타운의 직원이다.

동일시의 과정과 함께 끊임없이 분절되는 상황도 생성된다. 영화 연출적으로 컨티뉴이티는 끊임없이 깨어진다. 연속적인 장면이라 하더라도 카메라 위치가 바뀔 때 인물의 위치도 바뀌어 무언가 변한 듯한 느낌을 준다. 루시의 행동이 연속적이라도 주변 인물들이 어느새 다르게 행동하거나 대화의 분위기가 달라져 미묘하게 시간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상황들은 시간적으로 분절되었으나 동시적인 성격을 지닌다. 제이크의 아빠는 한순간 머리가 세고 기억을 잃어버리며 엄마는 침대에서 죽어간다. 아빠는 이내 젊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 공간에 분절된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엄마는 젊어지고 제이크의 이유식을 묻힌 옷을 세탁해 달라고 말한다. 그 옷은 늙은 제이크 엄마의 옷이자 이후 제이크 아빠가 가져다주는 옷이기도 하다. 시간은 교차되고 물건(옷)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흔적이 남는다. 이와 함께 강아지 지미가 남기는 지하실 문의 자국도 시간의 흔적이다. 어린 시절 제이크의 방에는 루시의 시 ‘본도그’가 있는 책이 있고 죽어버린 혹은 죽을 지미의 유골함이 있다. 또 제이크가 브르르를 버린 고등학교의 쓰레기통에는 브르르 컵이 수백 개가 꽉 채워져 있다. 이처럼 흔적 보관소 혹은 기록물로서의 물건과 공간은 계절에 따라 꽃이 피어나고 지듯 유사한 형태의 삶이 반복적으로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시간의 분절적이며 동시적인 성격은 루시의 말과 연결된다. 루시는 우리가 시간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정지해있는 우리를 지나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성이 아니라 시간에의 수동성을 보여준다. 루시가 제이크의 부모를 지나가는 시간인 것처럼 느껴졌을 때 그녀는 제3자의 위치에서 쇠락해가는 가족을 바라본다. 하지만 루시는 다시 시간에 놓인 인간이 된다. 인간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시간을 왜곡시킨다. 루시가 창밖에서 본, 차에만 내리는 눈은 시간이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는 겨울이 지나도 부모의 집에 처음 도착한 계절을 기억한다. 영화에서 시간의 상대성은 물리학이 아니라 인지에 관한 것이다.

루시가 시간이 우리를 지나쳐간다고 할 때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우리가 시간을 지나쳐가고 있다고 믿지만’이라는 대사다. 우리는 시간을 종종 혹은 자주 오해한다. 인간이 정지시켜놓은 시간은 그 자체의 정지라기보다는 인식이 행한 정지일 것이다. 시간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기억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간이 연속된다는 인식은 통속적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기재하면서 현전화하는 장래로서의 근원적 시간과 지금이라는 시점의 연속으로 이해된 파생적 시간으로 나눈다. 근원적 시간은 또한 본래적 시간성과 비본래적 시간성으로도 구분된다. 본래적 시간성은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기재를 반복하는 순간으로서의 시간성이며, 비본래적 시간성은 예기하면서 간직하고 기재를 망각하는 현전화를 말한다. 영화는 통속적이고 파생적인 시간으로부터 탈피하고 근원적 시간으로 향하지만 본래성을 찾는 문제에 있어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

본래성을 찾으려는 과정에서의 인식은 감정과 시간, 심지어 존재까지 정지시키고 왜곡한다. 강아지 지미는 두 번째 등장에서 루시의 앞에 있다는 정보는 있지만 화면에 나오지 않고 세 번째 등장에서는 화면에 나오지만 인물들은 지미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한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이 된다. 공간에 남겨진 시간은 지미와 마찬가지로 자주 전복된다. 루시와 제이크가 나누는 색에 대한 상대적인 인지의 이야기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에서 시간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화하는 것이다. 시간화는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라 도래(자신보다 앞서다)-기재(이미 존재하다)-현전(존재와 함께 존재한다)이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진다. 현존재는 죽음과 관련된 존재이기에 다른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가능성과 함께 고유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시간에 관계된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이란 지금이란 시점의 연속이 아니다. 그렇기에 통속적인 시간 인식에만 머무를 경우 목전의 현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때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은 본래적인 자기로 도래하기 위한 죽음으로의 선구다. 극단의 가능성 앞에서 과거를 근원적으로 반복하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상황이며 현재는 순간(Augenblick)이 된다. 영화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고 시간은 목전의 현재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순간이 된다. 죽음에 선구하려는 시도 속에서 매순간 자신을 전체로 구현하는 분절된 순간을 목도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한 개인의 시간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의 시간을 현재로 두는 과정에서 시간의 혼란이 온다.

영화는 근원적 시간 속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있지만 본래적 시간성만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초점은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루시는 죽음 앞에서 비본래적인 자신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이러한 시간의 문제는 곧 인식의 문제로 이어진다. 인식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이 없는 풍경화인 루시의 그림에서도 연결된다. 그림에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고 화가의 감정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는 루시의 말에, 제이크의 아버지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감정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루시는 환경에서 느끼는 것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며 환경 자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동시에 내려다보지 않고 앞을 보며 풍경을 본다면 무언가를 느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인식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의 테마에 맞춰 본다면 시간에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 통속적인 인식으로 시간을 이해해왔다면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시간을 다시 인식하고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가능하다.



2. 끝내지 못한 것들의 불안

영화는 돌아와야 한다는 목적을 향해 달리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 루시는 끝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지속한다. 부모의 집으로 가는 차에서도, 지속되는 반복의 계단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그녀가 지은 ‘본도그’라는 시는 루시가 결국 이루지 못한, 돌아오는 것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시의 여행은 출발에서부터 비극적인 결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언제나 진정한 회귀가 아닌 길을 회귀라 믿으며 반복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루시는 집에 돌아왔으나 다시 떠났고 셀 수 없이 많은 회귀와 떠남의 반복 속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완전히 돌아오지도 못하는 삶을 보냈을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삶 자체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고, 적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이 언젠간 나아질 것이라 믿고 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루시가 끝낼 것을 끝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자의를 넘어선 외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는 루시를 잡아두려 한다. 직원은 루시에게 앞으로 갈 필요가 없으며 털시 타운에 남아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최초의 목표를 기억하는 루시와 제이크는 체인을 단 자동차를 달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경로는 이탈되고 제이크는 루시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브르르를 버린 후에 제이크는 키를 뽑고 출발을 하지 않는다. 집으로 가자는 말에 농장 집을 말하는 거냐고 묻기도 한다. 루시와 키스를 하고서는 어디서 자신을 보는 청소부를 발견했다고 말하며 키를 가지고 남자를 찾으러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루시가 오랫동안 기다리다 나왔을 때 닫힌 문은 얼어버리고 루시의 앞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그곳은 루시가 가려던 곳과 전혀 동떨어진 곳이다. 루시와 제이크의 대역이 있는 고등학교는 루시의 과거로의 회귀로도 보이지만 그곳에서 목격하는 것은 대역의 재연과 죽음이다. 그곳 역시 그녀가 진정으로 돌아갈 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종착점을 끝없이 비껴가는 길을 인간의 운명으로 본다. 그러한 태도는 영화의 연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이크의 부모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을 때 카메라가 선행해서 소파나 턴테이블을 가리키면 이후에 그들이 그곳으로 따라간다. 이것은 그들이 필연적으로 혼란스러운 집으로의 방문과 불가능한 귀로를 반복해왔음을 의미한다. 저녁 식사가 나와도 아무도 음식을 먹지 않은 채 식사가 끝나는데 이것을 치우는 사람은 처음 보는 손님인 루시이며 제이크의 가족은 가만히 있는다. 루시는 마치 이 집에 오래 와본 사람 같은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루시의 제이크의 부모 집 방문은 처음이 아니며 그녀는 늘 제이크, 그의 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떠나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후회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끝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 영화는 강박적인 자문을 한다. 그것은 루시에게 걸려오는 전화로 알 수 있다. 안경을 써야만 전화를 받는 루시는 루시와 루시를 지칭하는 이름인 루이자로부터 계속 전화를 받는다. 영화에 삽입된 영화의 주인공 이본, 후에 루시와 대체되는 인물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한다. 통화 내용은 영화의 도입부에 루시를 내려다보는 청소부가 중얼거리는 말과 겹쳐진다. ‘그 가정은 옳다. 내 두려움은 커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라는 중얼거림 이후 전화는 같은 목소리로 ‘풀어야 할 의문은 하나다. 무섭다. 내가 미쳤나. 정신이 혼미하다. 그 가정은 옳다. 내 두려움은 커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라고 한다.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하고 심적인 확신도 있다. 그리고 대답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대답을 독촉하는 전화는 루시를 계속 압박한다. 청소부가 루시로 동일시된다고 보면 전화는 루시가 자신에게 하는 독촉일 것이다. 끝낼 것을 생각한다는 루시의 직접적인 나레이션보다 중압감 있고 집착적인 느낌을 준다. 흐릿한 것을 명확하게 보게 하는 안경 착용의 행위는 자신의 상황을 바로 보려는 행위다. 그렇게 루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행동하지만 결국 끝낼 것을 끝내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평론 나머지 글은 busan.com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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