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신춘문예-희곡] 자정의 달방 이 도 경
인물
여자, 30대 초반
남자, 20대 후반
주인, 50대 중반
때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곳
모텔 방 안
무대
낡은 모텔 방 안. 왼 쪽에는 화장실 문이 있고 오른 쪽에는 침대가 있다. 가운데 놓여진 작은 테이블. 위에는 온갖 음식들이 담긴 일회용 접시들이 늘어져 있다. 뒤편으로는 창문이 있고 러브호텔, 대실 2만원 등 네온사인 간판들이 보인다.
어두운 무대 밝아지면,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여자의 뒤를 따라 남자가 들어온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음식을 먼저 펼쳐놓는다. 남자는 방 안을 둘러본다. 서랍과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하고 침대에 앉아보기도 한다.
여자 들어와요.
남자, 신발을 벗는다.
여자 좀 좁죠.
남자 (남자는 꽤 웃고 있다.) 모텔 사는 사람 처음 봐요.
여자 그게 나쁜가요?
(사이)
남자 아니요. (둘러보며) 좋네요.
여자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려둔다. 그러나 의자는 하나뿐이다. 하는 수 없이 침대 앞으로 테이블을 민다. 자신은 침대에 앉고, 남자에게 의자에 앉으라며 가리킨다.
여자 앉아요.
남자 침대에 같이 앉는 건 안돼요?
여자 (무시하고) 생각해보면 고시원보다는 훨씬 나아요. 생각보다 달방 저렴하고.
남자는 여자가 가리킨 자리에 앉는다. 여자보다 남자가 앉은 의자 높이가 훨씬 높다.
남자 근데, 의자가… 좀 높네요.
남자, 자리와 여자를 번갈아 본다. 여자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음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꺼낸다.
여자 (한숨을 내쉰다) 젓가락이….
남자 여기서 산다면서 젓가락도 없어요?
여자 최대한 짐 줄이느라고요. 나무젓가락 쓰는데.
여자, 서랍과 가방 여기저기를 뒤져보면서 일회용 젓가락을 찾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남자 나가서 하나 얻어올까요?
여자 아까 봤잖아요. 밖에 편의점 없는 거. 죄다 술집이라서.
(사이)
여자 왜 하필 젓가락을 안 가져와서는.
남자 일 층 가서 사장님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여자 안돼요!
남자 그 정도는 있지 않나? 안 되면 일회용 칫솔 같은 거 네 개 구해다가,
남자, 젓가락질 하는 시늉을 한다.
여자 사이가 안 좋아요.
남자 그냥 나갔다가 올게요.
여자 그러지 말고, 그럼
남자 근처 술집에서 얻어올게요. 아니면 빌려보든가.
남자, 외투를 다시 입고 나가려는데 여자가 붙잡는다.
여자 그냥 먹어요.
남자 어떻게?
여자 손으로.
남자 손으로?
여자 우리 아까 몰래 담느라고 국물 있는 음식들도 아니고.
남자 그렇긴 한데.
여자 굳이 나가서 좋을 것도 없고.
여자, 테이블 앞에 앉아 먹는 시늉을 먼저 보인다. 하나를 집어먹더니 화장실로 가 손을 씻고 다시 앉는다. 남자도 곧 따라 앉는다. 둘은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꼭 먹어야 한다는 임무를 가진 사람들처럼 음식에만 집중한다.
남자 물 있어요?
여자 아까 음료수 한 병 챙겨 올 걸.
남자 아, 그렇네. 음료수 따로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거던데.
여자 역시 호텔 뷔페가 좋아요.
남자 근데 왜 이런 거만 담았어요?
여자 직원한테 들킬까봐. 저도 초밥 스테이크 이런 거 싸 오고 싶었죠.
남자 그래도 김밥은 좀 심했다.
여자 직원한테 들킬까봐. 요즘은 뷔페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더….
남자는 손으로 김밥을 집어들어 이리저리 살피고는 다시 입에 넣는다.
여자 고기는 식으면 하얗게 굳어요. 기름이.
남자 아까 랍스터도 맛있었는데.
여자 그건 비닐에 넣다가 찢어져요.
남자 튀김 같은 것도 있지 않았나?
여자 비닐에 넣어도 가방 안에서 기름이 묻어나잖아요.
남자는 테이블 위 음식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남자 다 뭉개졌네.
여자 어쩔 수 없죠.
남자 회 같은 걸 챙기는 거였는데.
여자 그럼 오는 길에 초장을 사 와야 하잖아요.
남자 그거 얼마 한다고.
여자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는 것보다 음식이 더 중요하다. 여자는 음식을 손으로 집어 삼킨다. 천천히 맛보는 게 아니라 급히 먹고서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물을 찾아 건네보지만 생수병이라고는 없다. 종이컵에 수돗물을 담아 갖다 준다.
남자 아까 너무 많이 먹긴 했지.
여자 한 번에 먹어둬야 해요. 나 같은 사람들은.
남자 음식 여기 놔두고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여자 (잔기침) 나중에 먹을 것 같지도 않고 다 버려야 하는데 아깝잖아요.
남자 그게 아까워서 뷔페는 어떻게 갔는지 몰라.
(사이)
여자 내 돈이었으면 안 갔어요.
남자 응?
여자 얻었다고요.
남자 어디서?
여자 라디오 경품으로.
남자 그걸 나한테 판 거라고?
여자 반 값에 팔았잖아요.
남자 아니, 1인분이라고 해도 그렇지.
여자 난 분명 중고나라에 2인 식사권으로 올렸고, 그쪽은 1인분만 사겠다고….
남자 그럼 당신은 돈도 벌고 밥도 먹고?
여자는 남자가 아까 떠다 준 수돗물을 마신다.
여자 한 사람당 십만 원짜리인데 두 명에 오만 원으로 올렸잖아요.
남자 그래도 그렇지, 차라리 식사 동행을 구하면 몰라.
여자 그쪽이 1인용 식사권만 필요하다고 하니까.
남자 누가 봐도 내가 좀 억울하지 않나?
여자 1인분 버리는 것보다 내가 먹는 게 낫잖아요.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관중 앞으로 다가간다. 한 바퀴 돌며 자신의 옷차림을 매만진다. 머리를 쓸기도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는 말한다.
남자 그럼 여자인 거 미리 말해주기라도 하지.
여자 그게 왜요?
남자 아니, 2만 5000원쯤이야 데이트 비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고,
여자 데이트?
남자 남녀 둘이 만나면 데이트지.
남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던 자신의 자리, 의자를 들고 여자 옆으로 옮겨 앉는다. 여자는 남자의 반대편으로 상체를 약간 뺀다.
남자 먼저 밥도 먹고 여기까지 오자던 건 당신이지 않았나.
여자 단순히 식사권은 2인용이었고.
남자 그럼 다른 친구라도 같이 가면 되는 걸 나한테 먼저, 같이 가자고.
(사이)
여자 뭘 좀 착각하신 것 같네요.
남자 세상 어느 남자가 이걸 데이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여자 저는 단순히.
남자 당신도 생각해봐요. 호텔 뷔페에서 마음껏 배불리 먹었지. 그 후엔.
(사이)
남자 모텔까지 데려와 놓고!
여자 그런 거 아니에요.
남자 그럼 뭔데?
여자 아까워서.
남자 정말 그게 다라고?
(사이)
여자 혼자 밥을 못 먹어요. 단 한 숟갈도.
남자 그럼 어떻게 혼자 사나, 말이 안 되는데.
여자 당신이 필요했어요. 나가서도 같이 먹어 줄 사람이….
남자 배부르지도 않나?
여자 벌써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남자 차라리 친구나 가족이나, 누구라도.
여자 없어요.
남자 아무도?
여자 아무도.
(사이)
여자 (객석을 바라보며) 우리 두 번은 안 볼 사이잖아요. 그냥, 한 번에 먹을 뿐이에요, 며칠 치를. 음식은 항상 나눠야 한 대요.
남자 안 볼 사이인데 난 당신이 어디 사는지를 아네요.
여자 난 당장 내일 이사 갈 수 있거든요.
남자, 엉덩이에 의자를 붙인 채 다시 여자의 반대쪽으로 가 앉는다.
여자 정말 배가 고플 땐 편의점에서 라면… 그마저도 편의점 안에서 누가 라면 먹고 있기를 기다렸다가 옆에 서서… 혼자로 안 보이게
남자 대체 왜?
여자 불쌍하잖아요.
여자는 일회용 접시 위에 있는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는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빤히 바라본다.
여자 밥 한 끼 같이 먹을 사람 없는 내 자신이.
여자, 사레가 들린 듯 자기 가슴을 두드린다.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한다. 여자가 토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따라가 화장실 문을 열어보려 하지만 잠겨있다. 문을 열려고 하는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 잠깐 열어봐요.
여자 안돼요.
남자 등이라도 두드려줄게요.
여자 싫어요.
남자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앉아 휴대폰으로 노래를 튼다. 화려한 클래식 음악 소리가 깔린다. 곧 소리가 멎고 여자는 입을 닦으며 나온다. 여자는 다시 자리에 앉지만 침묵.
남자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여자 한 번에 먹어둬야 해요.
남자 배 안 불러요?
여자 배불러 본 적 없어요.
남자 아까도?
여자 뭘 먹어도 항상 배가 고파서.
(사이)
여자는 또다시 음식을 집어먹는다. 구역질을 한다. 그러면서도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면서까지 음식을 삼킨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따라 자신도 음식을 먹는다.
남자 (입안에 음식물이 담겨 발음이 부정확하게) 애채 어가 으아애어?
여자 (여자 역시 음식을 먹으며 대답한다) 어아?
남자 (다 삼킨 후) 대체 뭐가 어때서?
(사이)
남자 사람들은 관심도 없어요. 누가 혼자 살고 누가 뭘 먹고 누가 뭘 어떻게 하는지 자기 상관할 바 아니라서.
여자 언젠가부터. 혼자 무언가를 먹으면….
남자 혼자 먹으면 더 맛있지.
여자 혼자 먹으면… 삼키지를 못해요.
남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다시 여자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여자는 가만히 있는다. 남자는 여자의 등을 두드려준다.
남자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누가 뭘 혼자 먹든 먹고 토하길 반복하든.
여자 혼자 밥 먹는다고 음료수 서비스 받는 것도 싫었고.
남자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여자 혼자 밥 먹을 만큼 식탐 있어 보일 거고.
남자 사람들은 당신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어요. 뭘 하든.
(관객석을 가리키며) 저 멀리서 사람들이 우리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여자 지켜보고 있는지 누가 알아요? 항상 옆에 있다고들 하잖아요.
남자, 주위를 둘러보며 팔을 내젓는다. 두려운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남자 누가…? 옆에 뭐가 있나? (남자는 자신의 두 팔을 문지르며 허공을 둘러본다)
여자 옆에 항상 있다고 했어요. 우리 엄마가.
남자 엄마?
여자 엄마 유언 같은 거였어요.
(사이)
여자 반찬가게를 했었어요. 밥 잘 챙겨 먹는 걸로는 일등이었는데 우리 집. 근데 엄마가 다음 날 팔 음식 다 만들어 두고 밤 늦게 퇴근하다가. 차에 치인 거예요. 반찬은 다 따뜻하게 들어가있는데. 우리 엄마만 차가워졌어요. 뺑소니였는데, 너무 늦게 발견돼서.
남자 범인은 잡았고?
여자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당당하게도 장례식에 온 거예요. 그쪽 부모들이. 처음에는 몰랐어요. 부모인지도. 그냥 엄마의 건너건너 아는 사람인가보다, 했는데. 더 웃기는 건 그때 밥까지 먹고 갔거든요.
남자 왜 엄마 음식이었어요? 아깝지 않나.
여자 엄마가 꼭 모두한테 대접하고 싶어했거든요. 근데 저는 그때… 토할 것 같았어요. 다들 나만 불쌍하게 보고, 이제 혼자 밥 먹고 혼자 자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여자는 남자의 품 안에 고개를 묻고 흐느껴 운다. 그러나 울다가 속이 메이는 듯 헛구역질을 한다.
여자 토할 것 같아요.
(사이)
여자 혼자라서 힘도 아는 것도 없으니까, 사람들은 다들 불쌍하게만 보고.
남자 누구는 돈도 없어 혼자 모텔 사는데….
여자 여기 사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자 그럼?
여자 항상 옆집 사람이 바뀌잖아요. 내가 혼자 사는 걸 아무도 몰라요.
남자는 객석을 바라본다. 여자, 일어나 종이컵을 든다. 물을 뜨러 화장실로 향하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여자는 놀라 뒷걸음질 친다.
남자 누구예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남자를 방 어딘가에 숨겨보려고 하지만 마땅한 공간이 없다. 남자는 문 뒤편에 숨어있고 여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마찰음이 들리고 등장하는 모텔 주인.
주인 아가씨.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여자 갑자기 무슨 일로….
여자 아….
주인 다 좋은데, 이건 아니지.
여자 쓰레기 잘 버릴게요. 환기도 잘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