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한다…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없을 뿐
중력과 은총 / 시몬 베유
큰 사상은 계속 소환되는 법이다. 34년의 삶을 불꽃같이 살다 간 여자, 시몬 베유(1909~1943). 1978년 한국에 소개됐을 때 그는 ‘불꽃의 여자’였다. 노동운동가, 레지스탕스로 살았던 면모가 알려졌다. 당시 진통하던 한국사회가 그런 면모를 보고자 했다.
레지스탕스보다 영성주의자로 쓴 글
불행의 끝에서야 위안 마주할 수 있어
신이란 표상마저 비워야 은총도 가능
팬데믹 시대에도 유효한 희망 메시지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영성주의자의 면모다. ‘이 세계에 신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이 세계가 바로 신이다’라는 면모다. 왜 그가 다시 소환되는가. 1950년대 알베르 카뮈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시대의 허무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시몬 베유’를 불러냈다. 희망의 이름으로 그를 소환했다. 절망 속에서 반항과 연대를 그린 소설 <페스트>의 연장선상이었다.
2021년 연말, 초유의 팬데믹 속에서 출간된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에서는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이 책은 종교적 수상록이자 인간이 처한 근본적 삶의 조건을 파헤친 인간 탐구의 기록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신은 인간 한계가 지향하는 그곳, 위대한 자연 속에 깃들어 있다. 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인간을 남김없이 탐구한 끝에 인간에게는 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니체 이후는 뭔가 다른 신이어야 한다. 시몬 베유가 포착한 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신이 뭔가 다른 그 신이 아닐까 하는 거다.
“위안이 없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 위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위안을 생각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형용할 수 없는 위안이 내려온다.”(22쪽) 불행, 그 끝의 끝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위안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말 같기도 하다.
<중력과 은총>에서 인간은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중력은 자연의 힘이다. 또한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하게 하는 것이 중력의 힘이다. 나빠지는 힘이 더 큰 것이다. 그런 중력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시몬 베유가 보기에, 인간이 거스르기 힘든 ‘거대한 짐승’이 있다. 인간의 폭력성, 야만성이라고 할까. 리어왕의 비극도 중력과 힘의 비극이다. 시몬 베유는 전쟁과 폭력 살상이 뒤엉키는 <일리아드>에서 인간의 측은한 모습을 읽어낸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그 힘이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거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는 거다.
그런데 어떤 빛나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아킬레스에게 찾는 순간이 그것이다.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스가 처참한 인간 운명에 대한 서글픔을 공유하는 순간이라는 거다. 이 순간이 은총의 순간이라는 거다. 시몬 베유는 묻고 말한다. “중력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은총은 받아들이기 위한 빈자리가 있는 곳에만 들어온다.” 또 말한다. “인간은 아주 짧은 섬광의 순간에만 세상의 법칙들을 벗어날 수 있다. 정지의 순간, 관조의 순간, 순수직관의 순간, 정신적 빈자리의 순간, 도덕적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런 순간에 인간은 초자연에 이를 수 있다.”(20~21쪽)
이런 일화가 있다. 중국에서 큰 기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몬 베유는 오열했다고 한다. 사르트르의 애인 시몬 보부아르는 “철학적 재능보다 그 눈물 때문에 나는 그녀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범인류의 한 사람, 시몬 베유는 그런 사람이었다. 범인류적인 눈물의 순간도 은총의 순간일 것인가.
시몬 베유가 말하는 신은 특이하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신이다. “나의 사랑이 환상이 아님을 전적으로 확신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신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실재적인 그 어떤 것도 내가 신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떠올릴 수 있는 것과 닮지 않았음을 전적으로 확신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154쪽)고 했다.
그러면서 “신의 부재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경이로운 증거”(144쪽)라고 말했다. 또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149쪽)고 했다. “빈자리는 지고의 충만이다”(36쪽)라는 것은 똑 같은 말이다. 그 빈자리에 은총이 들어온다는 거다. 그런데 “그 빈자리도 은총이 만든다”(19쪽)고 시몬 베유는 말했다. 인간의 한계, 중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신’이란 표상조차도 텅 비워야 한다는 거다.
지금 시대는 시대의 불안, 우울을 넘어설 새로운 영성이 필요한 것일까.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리시올), <신이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새물결)도 최근 출간된 시몬 베유 작품이다. 시몬 베유/윤진 옮김/문학과지성사/258쪽/1만 4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