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신춘문예-단편소설] 알 수 없지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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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을 지났으니 자취방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길도 모르면서 앞서 걸었다. 방향이 틀리진 않아서 조용히 뒤따랐다.

할아버지의 빨간 체크 셔츠는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보통 외출복으로 입기엔 오래돼서 색이 바랜 옷들이 할아버지의 작업복이었다. 그래서 빨간 체크 셔츠는 듣자마자 기억이 났다. 작업 현장의 먼지와 땀 때문에 금세 변하긴 했지만, 그 셔츠는 다른 작업복들과 달리 깨끗하고 선명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처음 입으면서 할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옷 새로 샀냐는 말에 아니라고 얼버무리며 현관에서 옷매무새를 다듬던 할아버지의 두꺼운 손가락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리고 시진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더라. 또 시진 생각이 났다. 빨갛게 튼 시진의 볼과 손에 수분크림을 발라주던 기억. 강변을 돌며 점심시간을 보낼 시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사실 좋은 외투를 사주고 싶었지만 큰 소비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해주고 싶어 고른 게 수분크림이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맡았던 시카페어 향과 시진의 얼굴을 문지를 때 손끝에 닿던 튼 각질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유순하게 감은 눈과 내 옆구리를 간질이며 장난치는 손길도 떠올랐지만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다. 기차역은 보이지 않았다.



적색 15시

본가에 가면 할아버지랑 저녁마다 고스톱을 치고는 했는데, 화투가 내 자취방에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리모컨에 쌓인 먼지를 옷으로 문질러 닦아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나는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했다. 다이어리를 덮고 색연필을 케이스에 넣어 한쪽에 미뤄두었다. 원래대로라면 곧 토익 공부를 할 시간이었다. 뒤를 돌자 할아버지가 벽면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을 가리키며 뭐냐고 물었다. 아침 요가, 식사 시간, 토익 공부 같은 고정된 일정들만 따로 적어둔 크로노덱스였다. 시간표라고 답했다. 바쁜 거냐고 묻길래 고개를 저었다.

조용하다 했더니 텔레비전엔 아침에 보다 만 ‘다빈치코드’의 톰 행크스가 입을 벌린 채 멈춰 있었다.

그냥 이거나 틀어놔. 테레비 볼 것도 없다.

텔레비전 채널로 돌려주기 위해 리모컨을 잡는데,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게 양보하기 위해 매번 하는 말이다. 본가에서는 그래도 내가 리모컨을 잡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영화채널로 돌렸다. 할아버지는 나와 취향이 비슷했다. 영화관에 가서 돈을 주고 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뉴스 볼 때가 아니면 할아버지는 OCN이나 슈퍼액션 같은 채널을 자주 틀어뒀다. 나오는 대로 가리지 않고 봤는데 반응이 좋은 건 언제나 액션이나 스릴러 영화였다. 물론 나는 미스터리 공포를 좋아하고 할아버지는 통쾌한 액션 복수극을 좋아한다는 점이 좀 달랐다. 언젠가 한 번은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으로 타란티노의 ‘장고’를 보고 재밌었다며 내게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영화를 처음으로 돌렸다. ‘다빈치코드’는 여주인공 소피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피로 쓴 다잉 메시지에 의해 남주인공인 톰 행크스, 랭던이 유력 용의자에 오른다. 경찰인 소피는 다잉 메시지가 랭던이 범인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랭던을 빼돌린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소피에게 알리고자 했던 비밀을 파헤친다. 그들이 탄 차가 경찰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를 힐끔 살폈다. 할아버지는 벽에 상체를 기댄 채 집중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차가 대형 화물트럭 사이를 빠져나가자 할아버지가 작게 웃었다. 계속 망설이고 있었던 나는 그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 할머니 가족들도 알았어?

모르지. 딸은 눈치는 챘을지 몰라도.

그럼…… 장례식장엔 갔어?

갔지. 이튿날 가고, 화장터도 따라갔다 왔다. 화장하는 것까지만 보고 나왔어.

인사는 했어? 그 할머니한테.

했지. 생판 남이라 입관은 못 따라 들어갔지만, 사진 보고 속으로 많이 했어.

고개를 완전히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여느 때와 같은 덤덤한 표정이었는데, 그 모습이 갑자기 낯설었다. 나를 키운 어른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붉어진 귓바퀴부터, 입꼬리에서 턱으로 옅게 잡힌 주름들까지 찬찬히 들여다봤다.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공 일행이 가지고 있는 성배를 파괴하려는 악당이 또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 있었다. 결말에서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성배는 머릿돌 같은 물건이 아닌, 예수의 후손인 여주인공 소피 자체다. 그걸 모르는 악당은 성배를 찾기 위해 많은 곳을 훼손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체포되는 과정에서 총살당한다. 악당은 끝까지 알지 못했지만, 관람객의 눈에는 이토록 명확한 원인과 결과. 현실에도 영화처럼 그런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또 시진을 떠올렸다.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던 마지막 모습.

먼저 헤어짐을 고한 건 나였다. 여러 번 입을 벙긋거리며 망설이는 시진이 두려웠다. 이별 선고라고 생각했다. 정작 내 통보에 시진은 황당해했다. 그러면서도 거부하진 않았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별했다. 그때 시진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나를 빤히 보던 그 눈빛만 선명했다. 헤어질 생각은 없었지만, 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그래, 그러자. 그런 말을 읽은 듯 했다. 시진이 나와 끝을 결심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우리에게도, 명확한 원인과 결과가 있었을까.

할아버지.

응?

나도 헤어졌다, 애인이랑.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

나도 뭐가 자랑인가 싶어서 말 안 했지.

내가 먼저 웃었고 할아버지도 웃었다. 그 뒤로는 말없이 영화만 봤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 특히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구르는 장면에서 할아버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총구 앞에서 톰 행크스가 크립택스를 푸는 동안 나는 수납장에 기대어 놓은 할아버지의 회색 가방을 끌어왔다. 지퍼를 열자 안전화 밑창이 보였다. 안전화를 꺼내자 망치, 못이 든 주머니, 토시, 심지어 시디처럼 생긴 작은 그라인더 날도 있었다. 그리고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도. 애인의 장지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한 채 홀로 서 있었을 할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들 눈을 많이 의식하는 할아버지가 그랬을 리 없지만, 내 상상 속의 할아버지는 이 옷을 입고 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빨간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동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할아버지. 무덤까지는 따라가지 못하고 장지를 나오면서 할아버지는 그때 무슨 기분이었을까. 꺼냈던 연장들을 순서대로 다시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안전화를 뒤집어 넣고 지퍼를 잠갔다.

영화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소피의 정체가 밝혀졌다. 소피가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톰 행크스는 밖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아침에 보다 만 장면이었다. 다시 할아버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후손이 믿음을 없애버릴까요? 아님 새롭게 할까요? 당신의 믿음이 가장 중요해요. 톰 행크스가 소피에게 말한다. 소피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여기에 데려다줘서 고맙다고만 답한다. 둘은 웃으면서 그렇게 헤어진다.

저 여자는 괜찮을까.

톰 행크스가 마지막 비밀을 파헤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안 괜찮아도 뭐 어쩌겄어. 괜찮아질 때까지 그냥 살아야지.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말이 없던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주황색 18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는데도 할아버지는 집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날 방해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벽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이럴 땐 괜찮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휴대폰으로 무궁화호를 예매했다. 경로 우대권. 곧 시진이 퇴근할 시간이었다.

집 앞에 있는 제이 식자재 마트에서 돌나물을 사 왔다. 냉동고에 얼려둔 간장 불고기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해동하고 양파를 넣어 대충 볶았다. 밥통에 밥이 없어서 몇 개 안 남은 햇반을 뜯어 할아버지와 저녁을 먹었다.

예매한 기차는 오후 7시 50분 차였다. 설거지를 하고 나니 한 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벌써 외투를 입고 있었다. 늦는 것보다 빨리 가서 기다리는 게 낫다며 계속 시계를 봤다. 버스 타고 가면 금방이라 했더니 혼자 걸어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패딩을 꺼내 입었다.

밖은 이미 어둑했다. 머리 바로 위의 하늘은 군청색이었지만, 흔적처럼 한 줄 남은 주황빛 노을이 저 멀리서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갈림길의 중고서점은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핸드 그라인더 소리가 커졌다. 아까와는 다른 인부가 환하게 밝힌 가게 조명에 의지하며 기다란 철재를 자르고 있었다. 왼 다리로 철재를 밟고 앉아 천천히 그라인더를 움직인다. 인부의 몸쪽을 향해 불티가 일직선으로 튀었다. 낮에 봤던 것보다 선명해서 불꽃놀이처럼 보였다. 한쪽 면을 다 자르고 철재를 돌리던 인부가 제 소매를 잡고 확인했다. 파편이 튀었는지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작게 욕설을 읊조리던 인부는 툭툭 털고 마저 절단 작업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아까 말한 그 작업복 있잖아. 저거 하다가 많이 그슬렸다는 옷. 그거 버렸어?

안 버렸지. 어차피 작업하면 또 그슬리는디.

우리는 강변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낮보다는 사람이 많았다. 빠르게 달리는 자전거를 피해 할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기차역과 가까워질수록 많아지는 상가 불빛에 강변이 점차 밝아졌다. 나는 강기슭을 내려다봤다. 겨울에는 조금 느리게 흐르던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오늘도 시진은 이 길을 걸었을까? 시진의 방과 내 자취방은 반대 방향에 있었다. 그럼 이제 퇴근 후의 시진은 이 강변을 걷지 않는 걸까. 점심시간은 몰라도, 퇴근 후에는 그럴 확률이 높았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을 추켜올렸다. 연장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분홍색 19:30분

자동발매기는 매표소 옆에 있었다. 지나가면서 창구 안을 살폈다. 시진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무료한 표정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자동발매기로 향했다. 예약번호를 누르고 우대권을 뽑아 할아버지에게 건네는데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 전 눈이 마주쳤던 그 직원이었다.

시진 씨 여자 친구 맞으시죠?

아…… 왜요?

우시진 씨가 물건을 안 챙겨 가서요. 근데 연락이 안 돼서, 대신 좀 가져가실래요?

내일 주면 되지 않나요?

며칠 전에 퇴직했어요.

퇴직이라니.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목표 금액을 다 모아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한 걸까. 아님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걸까.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직원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중요한 물건들은 아닌 것 같던데 그래도 그냥 버리기 좀 그래서요. 사진도 있고.

놓고 간 게 뭔데요?

몇 개 없긴 해요. 볼펜이랑 수분크림, 사진…… 그런 것들요.

그냥 버려주세요.

그렇게 대답하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직원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매표소에 앉아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불안해진다고 말하던 시진의 얼굴과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을 망설이다 끝내 꺼내지 못한 말. 그때 시진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하려 했던 걸지도. 시진은 어디로 갔을까. 원하던 대로 홀가분하게 떠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마도 내가 아침마다 크로노덱스를 그리는 이유와 비슷한 사정일 거란 직감이 들었다. 19:30분 알람이 울렸다.

뒤따라온 할아버지가 내 어깨에서 가방을 끌어 내렸다. 어깨가 뻐근하게 아팠다. 양팔을 들어 가볍게 돌렸다. 가방을 멘 할아버지가 내 등을 작게 토닥였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 좀 기다려야 했다. 무궁화호 2번 탑승구 앞에 앉았다. 계단 바로 앞에 있는 5, 6번 탑승구와 달리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앉아만 있으면 무릎이 아프다며 내가 앉은 벤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가만히 있자 추워서 몸이 떨리길래 나도 일어나서 함께 돌았다.

희미하게 경적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무궁화호가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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