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호랑이 ‘범’이 내려왔다
[2022 신년기획-호랑이해]
“한국 호랑이는 살아 있다. 우리가 호랑이다.”
2022년 임인년 호랑이해의 화두다. 우리는 근현대의 시련과 좌절, 단절의 역사를 넘어 세계를 향해 포효하고 있다. 근대에 우리는 나라를 잃고 비참하게 짓밟혔으나 동학과 3·1운동이 깨웠던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식민지 굴레를 벗어나자마자 참혹한 세계사적 전쟁을 겪었고, 4월 혁명의 이상주의는 쿠데타로 꺾이고 거듭된 폭압 체제에 의해 짓눌려졌으나 우리는 기어코 민주주의를 우리 힘으로 달성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근대 혁명으로 빛난다면 식민지로 좌절한 우리는 스스로 성취한 민주주의 역사로 세계사에 우뚝 섰다. 우리가 호랑이라는 거다.
일제가 절멸시키려 했던 우리 호랑이
항일 현장 극동 러시아서 혈통 이어져
단군신화서 비롯된 동방의 ‘호랑이 나라’
서울올림픽과 월드컵서 세계를 ‘호령’
한반도 평화 통일과 국민 행복 위해
앞발 치켜들고 포효하고 있다 ‘어흥~’
일제가 우리를 짓밟았던 상징적 사건 중 하나는 한국 호랑이의 절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호랑이 절멸 작전을 감행했다. 그런 가운데 1917년 야마모토 정호군(征虎軍, 호랑이 정복 군대)은 한반도를 들쑤신 뒤 “다이쇼 시대의 우리는 ‘일본 영토’ 내에서 호랑이를 잡았다”며 서울과 도쿄에서 호랑이 시식회까지 열었다. 호랑이 두 마리를 잡고서 법석을 떨었다. 1924년 강원도 횡성에서 8척 호랑이를 포획했다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기사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한국 호랑이는 깡그리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 호랑이는 살아 있다.
한국 호랑이는 러시아 극동의 ‘아무르 호랑이’와 같은 혈통이다. 2014년 국내 연구팀이 유전자 분석으로 밝혀냈다. 식민지 시대에 간도와 연해주에서 ‘조선 호랑이’로 불리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뼈를 묻었던 숱한 이들이 한국 호랑이의 혈통이었다. 차가운 북방에 닿아 있는 호랑이 핏줄은 역사를 소급할 때 놀라운 바가 있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극동 러시아에서 한반도 동해를 잇는 ‘환동해문화권’을 그리는데 한국 호랑이의 서식 범위가 그와 똑같은 점이 예사롭지 않다. ‘옛날에 나는 떠났다/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백석의 빼어난 시 ‘북방에서’는 한국 호랑이가 한반도에 이른 북방의 여정을 읊는다.
호랑이 진화 역사를 보면 통(通) 아시아적이다. 한국 호랑이는 ‘북방’뿐 아니라 ‘남방’과도 이어져 있다. 이는 한국인의 유전 혈통이 북방계 60~70%, 남방계 30~40% 비율로 남·북방을 아우르는 사실과 다를 바 없다. 2018년 국제연구팀이 규명한 호랑이 진화 계보와 아종 6종의 확정은 흥미롭다. 현존 호랑이 공통 조상은 11만 년 전 중국 남부와 인도차이나에서 기원했는데 3만 4000년 전 북상해 ‘아무르 호랑이’가 되었다. 한국 호랑이는 인도차이나에서 중국 땅을 꿰뚫고 북상해 만주와 극동, 마침내 한반도에 이른 ‘아무르 호랑이’(속칭 ‘시베리아 호랑이’)다. 멀고 오랜 시간 속에 드넓은 아시아 대륙의 체취를 다 섞은 것이 한국 호랑이다. 아무르 호랑이 외 5종은 갈라진 순서대로 ‘수마트라호랑이’ ‘벵골 호랑이’ ‘남중국 호랑이’ ‘인도차이나호랑이’ ‘말레이호랑이’다. 이것이 현존 호랑이의 모든 계보다.
호랑이는 동방에 이르러 신화를 완성한다. 고조선 건국 단군신화가 그것이다. 이후 우리는 호랑이 나라가 됐다. 세계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풍부한 호랑이 설화의 나라, 호담국(虎談國)이었다. 중국 대문호 노신은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7000년 전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반구대 암각화에도 20여 점의 호랑이가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반구대에 고래 사슴 다음으로 많은 것이 호랑이 그림이다. 아무르강 하류 암각화(사카치 알리안)에도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그게 동북아시아 호랑이의 강역이었다. 반구대 암각화 그림에는 날쌘 호랑이, 근육질의 호랑이 등이 있지만 그중 압권은 ‘앞발을 치켜든 채 입을 한껏 벌리고 포효하는 호랑이’다.
포효하는 호랑이를 다시 불러낸 이는 20세기 초 육당 최남선(1890~1957)이다. 그는 한반도 형상이 “맹호가 발을 들고 동아대륙을 향하여 나는 듯 뛰는 뜻 생기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이라고 갈파했다. 육당은 “중국이 용, 인도가 코끼리, 이집트가 사자, 이탈리아가 늑대의 나라인 것처럼 조선은 호랑이 나라”라고 했다.
육당의 한반도 호랑이 형상론은 일본의 한반도 토끼 형상론에 맞선 것이었다. 1903년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는 에서 한반도를 토끼 모양이라고 낮췄다. 그것은 닭의 연장이었다. 일본에선 1890년대 일본요릿집 주인이 변발의 중국인들 앞에서 닭 모가지를 비트는 장면을 잡지에 게재하면서 조선을 능멸했다. 닭은 ‘계림(鷄林)’으로 지칭된 조선이다.
닭이나 토끼로 깔보는 일본에 대응하면서 육당은 1908년부터 소년들에게 ‘호랑이의 눈으로 천하를 보는 시야’를 당부하면서 조선 호랑이를 들고나왔다. 1908년 , 1913년 와 , 1914년 , 1920년 , 1925년 , 1926년 에 이르는 이 모든 잡지들의 창간호 표지에 호랑이 그림을 등장시켰다. 우리는 호랑이가 돼야 했다.
조선총독부가 기를 쓰고 호랑이 절멸 작전에 나선 이유가 있다. 특이하게 호랑이는 일본에 아예 없다. 지진이 일어나는 지리 특성상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13세기 송나라 그림이나, 18세기 조선통신사와 초량왜관을 통해 수입한 그림으로 호랑이를 구경한 정도에 불과했다. 19세기 에도 시대 말기에 호랑이를 왜곡해 그린 우키요에가 유행했다. 임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일화를 소재 삼아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의 적대자로 호랑이를 그렸다. 정한론의 전야였다. 요컨대 호랑이 절멸 작전은 ‘정해진 수순’ 같은 거였다.
한국이 식민지 해방 이후 점철된 고난의 시대를 명시적으로 넘어선 것은 6월 항쟁에 의한 1987년 민주화였다. 근현대의 가파른 고개를 힘차게 넘어서기 시작한 거였다. 이듬해 88 서울올림픽이 열렸으며 당시 국가 상징으로 채택한 것이 호랑이 ‘호돌이’ 마스코트였다. 1980년대 ‘3저 호황’에 의한 한국경제의 약진 속에서 한국 호랑이의 권토중래였다. 당시 ‘한반도 호랑이 형상’도 크게 부상했다.
이후 한국 호랑이는 2002년 월드컵 때 세계를 향해 포효했고, 2018년 팽창동계올림픽 때는 ‘수호랑’(수호 호랑이), 2020년 도쿄올림픽 때 는 ‘한반도 호랑이 형상’과 ‘범 내려온다’는 문구로 이어지고 있다. 범은 이미 내려왔다. ‘한국 호랑이’는 명목 1인 국민소득에서 2027년 일본을 따라잡을 거라지만, 실질 1인 국민소득에서는 이미 2018년에 일본을 앞질렀다. 영화 ‘기생충’ ‘미나리’,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BTS(방탄소년단),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세계 무대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새 밀레니엄이 깨어나던 2000년 0시 0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77개국에 ‘호랑이는 살아 있다’란 작품을 생중계했다. 최남선을 잇는, 한국 호랑이의 선포였다. 한반도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분단국의 신세를 청산하고 이제 어엿한 통일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거였다. 백두산 호랑이가 아프리카 사자와 혈투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백남준은 호랑이는 한국민 전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호랑이라는 거였다.
홍익인간에서 시작해 ‘사람이 곧 하늘’이라 천명한 동학혁명, 세계사적인 3·1 운동, 꺾이지 않았던 고난의 독립운동, ‘주어진 타의의 해방’…, 그 모든 것을 버무려 우리 민주주의를 끝내 성취한 ‘한국 호랑이’. 그러나 아직 과제는 남아 있다. 한반도의 평화 통일과 국민의 행복한 삶을 만드는 정치가 그것이다. 2022년 한국 호랑이는 앞발을 치켜들고 내일을 향해 크게 포효할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