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태의 요가로 세상 보기] 44. 마리차 아사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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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 마리차에게 바치는 자세인 ‘마리차 아사나’는 몸을 웅크리거나 비틀어 힘을 안으로 모으며 응축시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연 박미희. 현인 마리차에게 바치는 자세인 ‘마리차 아사나’는 몸을 웅크리거나 비틀어 힘을 안으로 모으며 응축시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연 박미희.

인도신화에서 마리차(maricha)는 새벽의 신·여명(黎明)의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자세는 현인 마리차에게 바치는 자세이다.

태양이 동쪽 하늘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지상의 모든 것은 연분홍빛으로 뒤덮인다. 새벽이 열리는 것이다. 이 새벽을 상징하는 존재가 여명의 여신이다. 매일 아침 태양보다 먼저 하늘에 나타나 암흑을 내쫓아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이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제 곧 얼마 후면 잠을 깨고 여명을 밟고 새해 아침으로 다가오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된다. 아니 역사의 수레바퀴 소리라고 할까? 무엇이 이보다 눈부시고 아름답다고 할 것인가. 날이 새는 새벽에는 해 뜨는 동녘 하늘로 밝음이 오므로 이것을 여명이라 한다. 해가 저문 다음에는 서쪽 하늘에 밝음이 남아 있으므로 이것을 박명(薄明)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새벽·여명이란 뜻의 라틴어 오로라(Aurora)가 있다. 1621년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 가센디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명의 신 아우로라(Aurora)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에오스(Eos)로서 금빛 전차를 이끄는 아름다운 여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극광(極光)이라고도 부르며 북반구에서는 노던 라이트, 동양에서는 서광(瑞光)·여명이라고 한다.

1차 대전 때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마타하리’는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를 뜻한다. 중장년들은 채시라 박상원 최재성 주연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2)가 떠오를 것이다.

다윗은 시련 가운데 있을때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라고 기도했다. 하루의 첫 시간, 첫 마음을 드리는 것은 구약에서 첫 새끼,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던 정신과도 통한다. 새벽과 아침은 영적이고 효율적이며 선한 시간이라는 개념도 포함된다.

새벽은 경건한 자에게는 찬미와 기도, 말씀, 묵상의 시간이다. 새벽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새날을 밝힌다. 최초의 순수한 빛으로서 희망과 잠재력을 상징한다.

새벽은 재탄생과 영적 계몽의 상징이 부여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벽은 사모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늘 그렇게 가슴이 설렌다. 새벽은 정결한 이슬로 채워진 출렁이는 사랑의 샘 하나 만날 것 같은 기대감이 드는 시간이다.

이 마리차 아사나(maricha asana)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오른쪽 무릎을 접어 왼쪽 허벅지 안쪽에 세우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으로 돌려 등 뒤에서 오른 손목을 붙잡아 앞으로 숙이면서 턱이 무릎에 닿게 한다. 양쪽 교대로 한다.

조금 더 숙달되면 그 자세에서 왼쪽 다리를 접은 채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려놓고 다른 동작은 동일하게 시행한다. 여기서 더 숙달된 숙련자는 첫 번째 자세에서 오른쪽 무릎을 반대쪽 왼손으로 돌려 등 뒤에서 잡고 행한다.

복부기관을 자극하여 소화와 배설 기능을 원활하게 해 준다. 또한 어깨관절을 유연하게 함과 동시에 등 근육을 펴줌으로써 긴장으로 인한 근육통을 해소시킨다. 손가락 힘(악력)을 강화시켜 준다. 생리통이 있거나 임산부일 때는 주의를 요하는 자세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제야의 종소리도 곧 울려 퍼지리라. 우리 모두 잘록하거나 도드라진 마디 하나씩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마스크로 시작하여 마스크로 끝나는 한 해가 된 듯하다. 마스크로 무장한 채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듣도 보도 못하던 시기를 작년에 연이어 견딘 한 해였다. ‘깜깜한 눈물, 막막한 절망’을 안고 비틀거리며 예까지 온 듯한 날들. 그래도 다시 희망이라는 비수 한 자루씩 품고 미래를 마중해야 하는 시간이 눈앞이다.

살아가는 매 순간이 선택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하는 미련과 후회와 아쉬움을 떨칠 수 없는 것이 범부들의 실존적 숙명이다.

푸르스트의 시(詩) 같은 ‘가지 않는 길’에 대한 집착과 미련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더 나은 발걸음을 디디려는 성취욕구·성장욕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오늘 주어진 또 다른 선택의 기회를 놓칠 수도 무겁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반성은 하되 거기에 함몰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때론 훌훌 털고 과감히 던져 버릴 줄도 알아야 된다는 것. 비우고 버려야만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한 해 마지막 일몰은 더 비장하고 장엄하다. 그것은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경건하게 배웅하고 새로운 한 해의 찬란한 미래를 마중하는 일이어서 더욱 그렇다.

꺼져가는 잿더미 속에서의 마지막 불꽃처럼 사위가 일렁거린다. 넘어가는 붉은 해의 적요한 움직임, 온몸을 던져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비워내고 사라지는 화엄의 세계, 그것은 핏빛 진한 울음이며 적멸 그 자체이다.

일몰을 보면서 후일 추하고 씁쓸하게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닌 아쉬움 속에 축복과 더불어, ‘잘 살다가는군’이라는 말 한마디 들을 수 있는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처연하고, 너무 짧고 아쉬워서 오히려 애잔한 일몰의 시간은 찰나 그 자체이다. 한여름밤의 꿈을 꾸고 있는듯 너무도 빨리 지나가고, 너무도 빨리 어둠 속으로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을 어이하랴. 아련하고도 애틋한 청춘의 그 시절만큼이나 먹먹해지는 한 해의 끝자락 일몰의 시간이다. 아쉬움과 후회로 뒤범벅되어 가는 해가 못내 아쉬운 분들께 학명선사의 시 한 수를 들려드리고 싶다. 조금은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가고 봄오니 해바뀐 듯 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 속에 사네”

(忘道始終分兩頭 冬經春到似年流

試看長天何二相 浮生自作夢中遊

망도시종분량두 동경춘도사년류

시간장천하이상 부생자작몽중유)


<12월31일 즈음에 / 최진태>

결별의 시간/ 마지막 잎새 한 장/ 올드랭 사인

척박했던 길/ 그래도 애틋했다/ 소중하기만

어둠 속에서/ 추위속에서 조차/ 굳굳이 버틴

누구 삶인들/ 즐겁기만 했을까/ 장삼이사(張三李四)지

더 큰 고난도/ 작은 기쁨조차도/ 그렇고 그런

뚜벅이 걸음/ 묵묵히 걸어왔소/ 그냥 견디며

한결 같다네/ 살아있고 살아갈/ 질긴 목숨들

왜 사느냐고/ 그대 내게 물었지/ 미소 한번, 씩

꽃길들만이/ 기다리고 있는가/ 새해엔 정말

그렇고 그런/ 신년을 마중한다/ 그래도 희망

회한 가득한/ 아리고도 서러운/ 마지막 날 밤

진하게 우린/ 녹차잔에 담아서/ 훌훌 턴다오


<지는 해 /최진태 >

조용히 던지는 질문/ 그대 다했나? 숙제

걸렸네 핏빛 소울음/ 수평선에 가뭇히

꿈속에 꿈을 꾸었나/ 후회없이 불태운

천만번 쏟아 붓고도/ 여여한 저 초절륜

낙화암 강물빛 눈물/ 봐라 삼천 궁녀의

이 목숨 사라질 때에/ 한 점 부끄럼없이

살면서 후회없는 삶/ 없을까 돌아보면

그래도 부끄럼 하나/ 지우려 저리붉지

뒷모습 저리 곱다니/ 깨문 입술엔 피멍

그해가 그해이건만/ 허공엔 분별 한 쪽


체코의 음악가 드보르작의 제9번 신세계 교향곡 4악장이 어둠을 뚫고 여명을 일깨우며 새해 아침을 열었으면 좋겠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의 연주곡이면 더 좋을 듯한 웅혼한 곡이다. ‘신세계로부터 (From the New World)’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빠~ 밤 빠~ 밤 빠밤 빠밤 빠 바바바~’ 하면서 점점 빨라지고 높아지는 건 증기기관차 발차 소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드보르작은 맹렬 철도여행 애호가였다나.

스위스 희곡작가 막스프리쉬가 ‘만리장성’이라는 희곡에서 한 등장인물을 통해 “이 신세계 교향곡이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세계’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있는 곡이다.

양력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여기는 관습은 기원전 46년인 로마시대부터이다. 우리로 따지면 박혁거세 시대인데 이때 율리우스 력이 반포되면서부터였다.

‘극락에 나고자 하는가, 해 떨어지는 것을 보라’는 낙조 지듯 지난 한 해도 가라앉고 새해가 밝아 온다. 어스름한 새벽을 밝히며 붉은 해가 솟아 올라온다. 떠오르는 일출은 사색과 희망의 출렁임 그리고 열정으로 가득 차게 한다. 점점 밝아 오는 빛을 바라보노라면 짧은 시간에 주변을 느긋이 메우며 살아 움직인다. 연분홍빛 같기도 하고 푸르스름한 빛 같기도 한 여명의 빛, 그것은 곧 신의 빛깔 같다고나 할까?

어둠 속을 뚫고 떠오르는 그 빛은 희망과 도전과 의지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동트는 새벽이 있으므로 인류의 희망과 역사가 비롯되지 않았던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뜨는 해와 지는 해가 가르쳐 주고 있다. “하루를 떠오르는 해처럼 시작하고, 지는 해처럼 장식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

새해의 해돋이는 한 해의 서기(瑞氣)를 광명으로 채워 놓고 싶은 마음일 것이며, 새로움으로 출발의 의미를 다짐하고자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의 해 뜨는 나라로 불려 왔고,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는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다.

일출시각은 위도와 고도 별도로 차이가 나는데 고도가 높을수록 그리고 위도가 적도에 가까울수록 일출이 빠르다. 우리나라에서 일출시간이 가장 빠른 곳은 독도와 울릉도 성인봉이다.

아름답게 밝아오는 동편 하늘처럼 새해는 만인이 희망을 담금질하는 시간이 되기를 갈구해 본다.

소설가 이소정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에 봄이 온다고 믿는다”고 한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힘든 위기를 겪게하고 나서야 그 자신의 가장 빛나는 모습을 드러낸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한 구절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해인 수녀의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라는 시구도 가슴에 담아 본다.

역병의 위기 속에서 그리고 국내외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어둡고 참담한 심정으로 꿋꿋이 참고 버텨 온 시간들, 그래도 희망 한 짐 안고서 다시 힘을 모으며 새해를 맞이한다.

따뜻함과 넉넉함이, 편안함과 풍요로움이, 함께함과 나눔이, 사랑과 축복이 가득 넘치는 새해, 흉흉한 역병을 기어이 이겨내고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강같은 평화로움이 넘실거리는 새해, 모두가 손잡고 춤추듯 꿈꾸듯 덩실거리며 우리의 일상이 훤하게 열리는 새해가 되기를 염원하며 피안의 저쪽 어딘가를 향해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는 시간.

마리차 아사나는 몸을 작게 웅크리거나 비틀어서 힘을 안으로 모으며 응축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자세이다. 이 자세를 통해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보자. 저장되고 응축된 에너지가 새해 새 출발의 동력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도신화에 창조신의 아들이라는 마리차(Maricha) 이름 덕분에 창조 유지 파괴 및 소멸, 재생으로 이어지는 삼라만상의 원리와 만물의 생멸(生滅)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또 다른 꽃으로 새롭게 탄생함을 반복하며 이어져 가는 자연의 순환 이치를 돌아보게 한다.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화한다.

저문다는 것, 비운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은 새로이 밝는 것, 찬다는 것, 나타난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라지는 소멸의 과정이 다시 발현되는 생성의 과정과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둥 번개가 쳐도, 지구의 종말이 와도, 하늘 문이 열려도 세상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정녕 없는 것일까 하는 화두(話頭) 한 자락까지도 선물하는 새벽의 신·여명의 신 마리차 아사나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행복하기를” 법정스님의 축원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해인 수녀님 역시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이들에게 첫눈처럼 새해의 축복을 주십시오”라며 기도하고 있다.

요가의 현자도 거든다. “사르바 바반투 수키나”라며. “모든 이가 다 평온하시길.” 요가행자님들 모두가 부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새해를 맞이 하소서!


< 새해 / 최진태 >

까무룩 혼절도 하며/ 후회없이 살았다

저 빛난 죽음 목전서/ 하루를 또 한 해를

그 죽음 여명을 뚫고/ 부활하는 이 기적

푸른꿈 다시 그리며/ 은빛나래 펼친 채

설레임 가득/ 순례자 닮은 발길/ 가슴 차올라

그냥 가보기/ 지치지만 말고서/ 끝 보일런지

웅켜진 힘찬 두 주먹/ 임인壬寅년 살고지고



최진태 부산요가지도자교육센터(부산요가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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