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28곳 '가치가게' 아시나요
경남 김해시의 특별한 길 ‘웰컴로 42번길’. 서상동 수로왕릉 지역과 동상동 외국인 거리를 이은 길이다. 고대 가야의 정신인 환대와 공존을 ‘웰컴’으로 표현하고, 가야 건국인 해인 AD42년과 서로 맺은 관계 ‘사이’라는 의미를 함께 담았다. 이 길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28곳의 ‘가치가게’들이다. ‘가치가게’는 지역의 예술·다양성·역사·환경·나눔 중 한 가지 이상의 가치를 실천하는 곳을 말한다.
가치가게 프로젝트는 김해문화재단 산하 김해문화도시센터가 주관하는 사업이다. 김해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 상인들이 직접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자는 목표로 시작했다. 상인들의 역량 강화와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가치 크루’를 파견하고, 홈페이지(www.가치가게.com)·문화지도 구축 등 다양한 홍보 활동으로 가치가게를 지원하고 있다. 2020년 1차 사업으로 웰컴로 42번길 구간 내 29곳(1곳 폐업)을 발굴했고, 2차 사업은 부원동 25곳의 가게를 선정해 현재 안내정보 구축 중이다.
일상을 의미 있는 가치로 채우고 있는 ‘가치 지킴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예술:비둘기 영어학당
영어 가르치는 곳이지만
예술도 함께 나누는 공간
수로왕릉 정문 바로 앞, 그야말로 예술적인 곳에 비둘기 영어학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의 간판과 창문 너머 전시된 미술품이 눈에 띈다. 주인장 변선령(사진) 씨는 20살 때부터 10년 넘게 해외생활을 했다. 캐나다, 스웨덴, 영국,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일하다가 위궤양과 향수병을 안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김해로 왔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엔 통역을 했는데 큰 숫자를 다루는 일이 스트레스더라고요. 8년 전 어느 날 엄마와 수로왕릉을 산책하면서 이런 데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요. 거짓말처럼 이 가게가 ‘임대’ 안내를 붙이고 있더라고요. 바로 계약부터 해 버렸어요.”
성인 대상의 영어를 가르치는 곳이 왜 ‘예술’ 가치를 선택했냐 물었다. “예술을 너무 한정적이나 특정계층의 향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진행하는 영어 스터디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생각을 나눠요.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고 살아보지 않은 삶의 모습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죠. 이 과정에서 결핍이 채워지더라고요. 이게 예술이지 싶었어요.”
창가에는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스트리트 스튜디오를 꾸몄다. 지금은 ‘The Momemt We Shared’라는 이름이 붙은 정민지 도예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전시물은 정기적으로 바꿔볼 계획이다. 변 씨는 ‘스튜디오 카멜’이라는 갤러리도 운영 중이고 ‘금요일 올빼미 식당’ 등 소소하고 재밌는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구상하고 실행하고 있다.
“저 돌담 안은 2000년 전 그대로지만 돌담 밖 세상은 역동적이에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김해의 정체성 아닐까요. 돌담 밖 김해가 1mm만큼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가치를 만들고 싶어요.”
다양성:이솝 토스트
30년 넘은 동네 터줏대감
‘편견’ 없는 토스트 가게
동상동에는 경남의 이태원으로 불리는 로데오 거리가 있다. 손님도 대부분 외국인이고 가게 주인도 외국인이 많은 거리다. ‘다양성’ 가치를 내세운 토스트 가게라니, 궁금증이 일었다. 이솝토스트 김정화(사진) 사장은 동상동에서 장사한 지 30년이 넘은 동네 터줏대감이다.
“토스트가 인터내셔널 푸드 아닙니까, 하하. 식당 밥은 매일 사 먹기에는 비싸니까 외국인 근로자들이 여기로 많이 와요. 손님 100명 중에 98명이 외국인이에요. 언어요? 손짓 발짓 만국어가 있잖아요. 한국에 일하러 오는 친구들 다 똑똑해요. 한국말 잘합니다.”
김 씨의 ‘편견 없이 열린 마음’이 전해졌다. 그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영어 메뉴판’과 ‘맞춤 메뉴’이다.
밀크티는 네팔·스리랑카인 등을 위해, 핫치킨 토스트는 아찔할 만큼 매운맛을 좋아하는 베트남인들을 위해 직접 만든 메뉴다.
김 씨는 자신의 가게를 ‘복덕방 비슷한 곳’이라 소개한다. 외국인들이 쓰레기를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등 일상생활 중에 궁금한 게 있으면 찾아온다고 한다. 코로나 전에는 가게가 늘 외국인들로 북적였다.
“방글라데시인들이 행복지수가 높다고 하잖아요. 겪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시장에 걸인들이 지나가면 만 원짜리를 서슴없이 내놓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 돈을 모으지 생각하죠. 그런데 우리 기준에 맞추면 공존 못 해요. 저는 그냥 장사하는 건데 가치라고 해 주니 더 성실하게 해야겠다 싶지요. 코로나가 빨리 진정돼서 이 거리가 다시 활기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역사:해이담
수로왕릉 돌담길 카페
SNS 통해 왕릉 알리기 나서
걷기 좋은 돌담길은 덕수궁에만 있지 않다. 김해 수로왕릉 돌담길도 사계절 정취를 느끼며 걷기 좋은 곳이다. 그 고즈넉한 돌담길의 끝에 통창이 인상적인 카페 해이담이 있다. 카페 이름은 ‘김해의 돌담길’이라는 의미를 담아 안경현(사진) 대표가 직접 지었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카페를 차리고 싶었어요. 김해에 스페셜티 커피를 널리 알리고도 싶었고요. 가게 자리를 보러 많이 다녔는데 여기를 보자마자 ‘여기다’ 했어요.”
안 씨는 가게 인테리어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도자기가 전시돼 있는 ‘벽면 갤러리’는 감성을 더한다. “이곳 풍경을 해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췄어요. 수로왕릉 주위에 카페가 녹아들게 하고 싶었어요. 손님이 카페에 들어서면 바로 마주하는 바 카운터는 돌담길 느낌을 살렸고요, 2층에서 수로왕릉을 내려다볼 수 있게 통창을 냈죠.”
매장에서 쓰고 있는 머그컵이 눈에 들어온다. 지역에서 활동 중인 노정애 작가가 제작했다. 카페에서 노 작가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앞으로도 계속 지역 작가들에게 전시공간으로 내어 줄 계획이다. 안 씨는 ‘수로왕릉 알리기’에도 열심이다. 사계절 풍경을 사진에 담아 SNS로 공유하고 있다.
“가치가게에 참여한 이후 김해시가 문화도시로 선정되는 등 성과가 있었잖아요. 코로나로 크게 활동은 못했지만 가치가게가 도움이 됐다니 자부심이 있습니다. 김해의 문화유산인 수로왕릉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어요.”
환경:피카타임
옥수수 성분 컵·빨대 등
‘친환경 용기’ 사용 실천
동상시장에는 손맛 좋고 생각 깊은 ‘동춘씨’가 있다. ‘동상 청춘 시전’의 줄임말로 이른바 청년몰이다. 그곳 3층에 있는 디저트카페 피카타임이 실천하고 있는 가치는 ‘환경’이다. 파티시에 10년 경력의 박효진(사진) 사장은 2019년 12월 입점 때부터 ‘친환경 용기’를 쓰고 있다.
“환경오염이 나한테 그대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실천이 쉬운 것 같아요. 한 사람이 일주일간 섭취하는 미세플라스틱 양이 신용카드 한 장 무게라고 하잖아요. 이런 것들을 의식하게 되면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피카타임은 옥수수 성분으로 만든 테이크아웃 컵과 빨대, 접착제를 쓰지 않은 종이 컵홀더를 사용하고 있다. 개인 텀블러를 가져가면 음료를 10% 할인해 준다.
“친환경 포장재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고, 친환경 이름이 붙는 순간 비싸지죠. 그래도 계속 새로운 제품이 나오니 좋은 제품을 선택하려고 해요.” 단가가 올라가면 판매자 입장에서 부담스럽지 않을까. “한 잔당 몇십 원이에요. 쌓이면 크겠지만 그 정도는 환경을 위해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NO플라스틱 챌린지를 하는 분이 저희 가게를 인증한 글을 보니 뿌듯하더라고요.”
박 사장은 텀블벅 펀딩을 통해 ‘월간 피카’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무색소·무첨가의 질 좋은 재료로 디저트를 만들어 친환경 포장해 발송한다. 환경에 대한 소신뿐 아니라 일에 대한 열정도 딱 부러진다.
“가치가게는 환경을 생각하는 나의 소신이 확신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됐어요.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최대한 나의 소신을 지켜 나가려고 합니다.”
나눔:E9 PAY
간판·가게 불 밝혀
밤에도 환한 골목 만들어
김해의 이태원으로 불리는 로데오 거리는 밤에도 환한 골목이 있다. 해외 송금 서비스를 하는 E9 PAY 김해 대리점이 가로등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온 인두닐 씨와 송윤희(사진) 씨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인두닐 씨는 스리랑카 출장 중이어서 송 씨가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결혼 후 2018년에 인천에서 김해로 내려왔는데, 해가 지면 골목 다니기가 너무 무섭더라고요. 시장 안쪽에 가게를 새로 얻으면서 간판과 가게 불을 켜 놓자고 했어요. 처음엔 이웃들이 전기요금 드는데 괜한 일을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밤에도 밝아서 너무 좋다고 하세요.”
부부는 밤거리를 밝히는 일뿐 아니라 이웃의 마음도 밝히고 있다.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물 좀 달라 하기도 하고 가게 앞에 쉬어가시라고 의자를 내놓았다. “물도 나누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마음도 나눈 거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부부는 한국에 오는 스리랑카인들을 적극 돕고 있다. 인두닐 씨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동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간단하게 통역을 돕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고용이나 출입국 문제까지 알아봐 주고 있다. 페이스북에 정보를 올려 공유하고, 스리랑카인 밴드 공연을 후원하고 라이브로 중계까지 하며 동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단순하게 불 켜는 일이었고, 스리랑카인을 돕는 것도 그냥 일상이라 여겼는데 가치라고 해 주니 고맙지요.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찾게 되더라고요. 스리랑카인을 도울 봉사단체도 만들려고 해요. 우리가 받은 관심을 이웃 돕기로 갚겠습니다.”
글·사진=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