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부산백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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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일제 치하에 걸출한 조선인 의사가 있었다. 그는 평북 정주 오산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3·1운동에 가담한 일로 퇴학당하고 6개월간 옥살이까지 했다. 다음 해 복학해 수석 졸업했으나, 3·1운동 가담 전력으로 곧바로 의사 면허를 받지 못하다 2년간 무보수로 총독부병원에서 일한 뒤 의사 면허를 받았다. 바로 백병원 설립자이자 현대 한국 의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백인제(1898~?) 박사 얘기다.

그에겐 1928년 조선인 최초의 경성의전 외과 주임 교수, 1936년 당시 세계 최고라고 하는 독일 베를린대학 의학 연수 등 ‘한국인 최초’라는 기록이 숱하게 따라다닌다. 1941년에는 경성의전 교수직을 그만두고 ‘백인제 외과병원’이라는 간판으로 병원 경영에 나섰는데, 이게 백병원의 출발이다. 이후 1972년 우여곡절 끝에 서울백병원을 개원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뒤이어 시작된 부산백병원 건립은 사실 민관 합작 사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처음부터 공익적인 측면이 강했다. 병원 확장과 교육 분야 진출을 꾀했던 백병원 측은 1977년 때마침 정부가 발표한 의료 취약지구와 공단 지역에 대한 민간병원 건립 지원 계획을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전국적으로 5개 큰 병원이 나누어 지방 의료시설 확충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백병원이 부산 사상 지구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부산·경남지역엔 의과대학이 1곳뿐이었고, 부산백병원 부지로 선택한 개금동 지역은 저소득층이 밀집한 곳으로 의료 수요가 많고, 또 사상공단과의 거리도 2~3㎞에 불과해 정부의 요구 조건에도 잘 부합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의과대학과 부산백병원 건립 당시 시설비 75억 원과 장비 150만 달러의 재정 지원을 했다. 게다가 개원 초기 부산시민의 존경을 받았던 장기려 박사도 5년 동안 직접 진료와 수술을 집도하며 부산백병원의 안정화에 큰 도움을 줬다. 부산백병원의 안착과 성공은 시민과 정부, 지역사회의 공동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부산백병원이 동부산권 이전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 인프라 확충 난항이 그 이유라고 하는데, 설사 그렇다고 해도 설립 취지를 저버리고 내빼듯이 해선 안 될 일이다. 부산백병원은 민간 시설이지만, 공공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온 만큼 이 점을 늘 되새겼으면 좋겠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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